참 빨랐지 그 양반 / 이정록

정유진기자 | 기사입력 2020/03/21 [09:05]

참 빨랐지 그 양반 / 이정록

정유진기자 | 기사입력시간 : 2020/03/21 [09:05] | 조회수 : 6

 

  © 한국예술문화타임즈



 

참 빨랐지 그 양반
이정록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년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이정록 시집 '정말' 중에서
                
              ○ 이정록(1964~)
                   충남 홍성 태생
                   시인, 고교 교사

※ 정당·후보자에 대한 지지 또는 반대의 글을 게시하고자 할 경우에는 실명인증 후 등록하셔야 합니다.
실명확인 된 게시물은 실명인증확인 여부가 표시되며, 실명확인 되지 않은 정당·후보자에 대한 지지 또는 반대 게시물은 선관위의 요청 또는 관리자의 판단에 의해 임의로 삭제될 수 있습니다.
※ 본 실명확인 서비스는 선거운동기간(2020.04.02~2020.04.14) 동안에만 제공됩니다.
  • 실명인증
  • ※ 일반 의견은 실명인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
  • ※ 이 댓글에 대한 법적 책임은 작성자에게 귀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