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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소식〕“매혹의 지도”, 홍일표 시인과의 인터뷰

홍수연시인 | 기사입력 2021/07/27 [01:11]

[문단소식〕“매혹의 지도”, 홍일표 시인과의 인터뷰

홍수연시인 | 기사입력시간 : 2021/07/27 [01:11] | 조회수 : 906

  © 한국공정문화타임즈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지상의 꽃들은 숨 쉬지 않았다 눈길을 주고받는 사이 골목은 저물고 나는 입 밖의 모든 입을 봉인하였다 여섯 시는 자라지 않고 서쪽은 발굴되지 않았다 삽 끝에 부딪는 햇살들이 비명처럼 날카로워졌다 흙과 돌 틈에서 뼈 같은 울음이 비어져 나왔다 오래전 죽은 악기였다 음악을 놓친 울림통 안에서 검은 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다만 노래를 가지러 왔다

- 시인의 시악기중에서

 

 

<시는 질서도 의미도 사상도 아닙니다. 개똥입니다. 굶주린 들고양이며 야생 멧돼지입니다. 야생 멧돼지를 애완견으로 만드는 순간, 시는 죽어버려요. 시는 12가 되고 3이 되는 순차적인 것이 아니고, 1 더하기 12가 되는 뻔한 도식도 아닙니다. 공식도 없고 규칙도 없어요. 제멋대로입니다. 그러므로 스승도 없고 아비도 없는 것이 시입니다.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이고 아비를 만나면 아비를 죽이고 킬킬거리는 것이 시라는 괴물인데 그 괴물을 동물원에 가둬놓고 이미지와 비유, 시의 구조와 운율의 이름으로 괴물을 분해하지요. 그 순간 시라는 괴물은 사라지고 박제된 짐승만 유리 눈알을 박고 살아있는 듯 죽어 있어요. 시 창작 교과서와 시론서를 불태워버리고 잿더미 위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차라리 그것이 시를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읽고 쓸 수 있는 길이라고> 인터뷰에서시인은 말했다.

 

오직 노래하고, “노래를 가지러태어난 듯한 시인이살바도르 달리낮달의 눈으로 매혹의 지도를 그리고 있다. 시인이 캐낸 그 황홀한 매혹의 빛은 어떤 문양일까?

 

 

 

대표시

이면의 무늬

 

개가 개의 꿈에서 빠져나오는 동안

파도의 자세를 이해하는 것은 힘들고 위험한 일

공원의 가로등은 아무 것도 결심하지 않았는데

불이 켜지네

 

겨울이 명백한 휴머니스트라고 말하지 않아도 눈은 내리고

가로등은 끊임없이 어둠의 중얼거림을 거절할 뿐이네

발꿈치에 다른 계절이 눈물처럼 스미는 것

천 년 전 바람이 남긴 말의 각질을 뜯어내며

질기고 딱딱한 공기의 살과 해후하네

 

나는 드라이아이스 같은 너의 노래를 들으며

여기는 최소한 거기가 아닌 곳이라고 중얼거리지만

여전히 촛불은 미완의 음악

따듯하게 응고된 슬픔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견디는 것

 

그 사이 수차례 다녀간 눈과 비

봄과 겨울도 모르는 또 다른 목청의 노래가 발바닥이나 겨드랑이에 서식하는 걸

아직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파도는 알고 있었던 것이네

5분간, 내가 읽지 않은 파도의 표정이 거듭 쓸쓸해지네

 

- 시집매혹의 지도중에서

 

 

 

 

밀서

 

내 몸에 들어가 있는 밤이 빠지지 않는다 나는 어제의 바람과 어제의 공기에 익숙하여 두 번의 커피를 마시고 49년 전 죽은 한 여자를 만난다 그가 햇빛의 방향을 북쪽으로 돌려놓는 순간 한숨처럼 식어가는 햇빛이 내 등에 꽂힌다

 

나는 기침을 하면서 8시간 전 저녁을 열고 들어간 당신의 눈알을 뱉어낸다 등에 꽂힌 햇빛이 유일한 국적이다 국외자의 비자를 가지고 단순한 미래를 통과할 때 사과의 심장이 연쇄적으로 폭발하고 사과꽃은 누군가 찢어놓고 간 벤치 위 흰 적막이다

 

여기 없는 당신을 처형하고 나를 처형한다 순서가 바뀌어도 상관없다 지금은 아직 눈이 검은 어제이기 때문이다 눈앞에 없던 몇 개의 근심과 고독이 외래 식물처럼 혀끝에서 개화한다 나는 밤의 혀를 만질 수 없다

 

어제의 입술이 나를 증명하지 않는다 오늘도 나는 여기에 없고 죽음의 손끝으로 붉은 하늘을 벗겨보면 울음 가득한 당신의 심장이다 밤이 올챙이 같은 햇살들을 쏟아놓는 순간 나는 비에 젖지 않는 빗방울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 시집밀서중에서

 

 

 

 

중세를 적다

 

검은 눈을 헤쳐 보면 흰 눈이 나올 거라는

그런 희망 따위가 지구의 표정을 바꾸는 건 아니겠지만

맨손으로 아침의 껍질을 벗겨서

식탁 위에 올려 놓는다

몇 마리 새가 날아와 햇살 몇 줌 쪼다가 흑해의 어둠 속으로 투신한다

뿌옇게 날이 밝아 올 때까지

난파된 배 한 척 인양하여 진흙투성이 바닥을 끌고 나올 때까지

 

다시 온다

무궁한 세계의 아침과 저녁이 그리고 청동으로 빚어 만든 밤이 쇠사슬을 끌고 저벅저벅 온다 낯익은 미래를 만나는 거다 수백 년 전 깨진 얼굴, 불타 버린 심장이 다시 오는 거다

 

머릿속에 가득한

죽은 글자들

예언자의 입에서 번쩍이는 미래

 

너의 머리통을 부술 때까지 나는 해안 끝자락에 서서 세기의 어둠에 불을 지를 것이니

용서하라

아니 심판하라

죽어도 죽지 않는 샛별의 언약

 

아우성과 분노, 회한과 탄식을 끌고 빛을 따라 흘러 다니던 사람들은 혀가 찢겨서 성 밖으로 던져지고, 신의 음성은 갈수록 또렷하여 창과 검을 든 외눈박이 시종들이 몰려가는 곳마다 태양이 죽는다

 

그래, 그리하여 희망 따위에게 묻곤 한다

오늘의 중세는 언제까지냐고

뭇 생령들을 고문하는 당신의 판타지가 지겹지 않느냐고

 

- 시집중세를 적다중에서

 

 

 

 

# 방언은 뜨겁고 치열하고 외롭습니다.

 

 

 

홍수연 : 안녕하세요. 선생님. 매일 아침 페이스북에 올려주시는 칼 같고 꽃 같은 단상으로 뵙다가 이렇게 실제로 뵙게 되니 반가움도 두 배입니다.(웃음)심상신인상과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셨습니다. 무엇이 선생님으로 하여금 시인의 길로 인도하였을까요?

 

홍일표 : 어릴 적부터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어요. 내면에서는 늘 어떤 갈증 같은 것이 있었구요. 초등학교 때부터 글쓰기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했어요. 학교 도서관에서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 큰 힘이 되었어요. 3 때 학원문학상과 학생중앙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하면서 저의 꿈은 확실해졌어요. 그때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지요.

 

 

 

 

 

만해교 부근 소나무 숲을 지나가는데 누가 옷자락을 잡는다

아무도 없다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귀 기울이니 쿵쿵 심장 소리 들린다

귀가 고무줄처럼 자꾸 늘어난다

곧게 뻗은 소나무

자가발전 중인지 모터 소리 웅웅거린다

하긴 바깥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저 매끈한 살이 얼어 터지지 않는 것은 난방이 되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소나무 정수리에서 흰 연기가 폴폴 날린다

그것도 조금씩 사카린처럼 흩날린다

청정연료를 사용하는 탓일 게다

아래를 바라보니

소나무 숲 그늘이 어둡게 일렁인다

저 무거운 비애가 겨울 한철 견뎌내는 소나무들의 양식

겨우내 제 몸을 떠나지 않는 솔잎의 눈썹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스스로 쳐낸 가지 끝에서 배어나오는 말간 피,

몸 속을 몇 바퀴 휘돌며 쥐어짠 비애의 즙을

숲 그늘에 떨구고

스님 한 분 휘적휘적 걸어가신다

적송 한 그루 뚜벅뚜벅 걸어가신다

 

-숲에 가면 그가 있다전문, 시집살바도르 달리의 낮달중에서

 

 

 

홍수연: “저 무거운 비애가 겨울 한철 견뎌내는 소나무들의 양식이라고 하셨습니다. 비애가 양식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움의 시간이 있어야 할까요? 그래서 시의 마지막 행에 이르러 스님 한 분 휘적휘적 걸어가신다/적송 한 그루 뚜벅뚜벅 걸어가신다고 말씀하신 것이겠지요. 혜범 스님께서는 말씀하셨어요. <인생에 있어 최고로 행복한 사람은 소원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소원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깨달으면 소원하는 바가 어디 있겠는가.> 혜범 스님과 마찬가지로 시인의 몸과 마음도 텅 비었으되 가득 차 있는 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홍일표 : 오래전 시를 만나니 얼굴이 화끈거리고 빈 구석이 많이 보이네요. 이 시는 백담사 만해마을 집필실에 머물 때 쓴 시입니다. 제 시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기 전에 쓴 작품이지요. 시간 날 때마다 만해마을 부근 소나무숲을 거닐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가 겨울이라 눈 쌓인 소나무를 보면서 동안거에 든 스님을 연상했었지요. 개인적으로도 많이 우울했던 시기였어요.

 

 

 

홍수연: 이제니 시인은 시를 통해서 어떤 깨달음의 말을 늘어놓으려는 태도를 경계하며 자신이 써내려가는 시가 아무 것도 하려고 하지 않고 아무 것도 되려고 하지 않고 그저 시라는 그 무엇으로, 그것 그대로, 아무런 설명 없이, 아름답고 온전하게 존재하는 그 무엇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 하였습니다. 황인찬 시인은 완결을 미루는 시, 계속 읽히는 시를 쓰고 싶고 시는 뜻을 유예하는 일에 가깝고, 메시지가 완전히 전달되는 걸 오히려 방해하는 쪽이라고 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시의 본질은 무엇인지요?

 

홍일표: 몇 해 전 어느 문학 강연장에서 저는 방언의 시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어요. 방언은 성령을 받은 신자가 습득한 일이 없는 언어를 무아의 상태에서 하는 말을 뜻합니다. 저는 방언이 시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해요. 방언은 일상의 언어 질서를 파괴합니다. 무의식의 심층에 잠복해 있던 언어들이 도발적으로 나타나 소통의 단절을 초래하지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폭죽처럼 터져 정형의 세계를 흐트러뜨립니다. 그러나 방언은 뜨겁고 치열하고 외롭습니다. 일종의 홀림의 상태에서 폭발하는 낯설고 기이한 언어이지만 그 언어는 현실과 인식의 체계를 관통하여 의식의 지평을 확장합니다. 새롭게 태어난 언어는 낯설고 기이하여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익숙한 문법이 아니고, 듣도 보도 못한 외계의 언어이니 당연하지요. 혹자는 그런 언어를 엽기적인 신기주의(新奇主義)라고 비판하면서 나쁜 시, 고약한 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해 나온 시는 나쁜 시가 아니라 다른 시일 뿐입니다. ‘다른 시는 기존의 시와는 여러 모로 다르기 때문에 불편하고 거북합니다. 하지만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배척당하거나 비판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다양한 유형의 시들이 다채롭게 피어날 때 우리 시단은 더욱 풍요로워 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지요.

 

 

 

 

# 시인은 항상 신생독립국이어야 하고, 일당 독재이며 제국의 군주여야 한다고 믿어요.

 

 

 

 

솜사탕을 수국 한 송이로 번안하는 일에 골몰한다

 

솜사탕은 누군가 내려놓고 간 벤치 위의 따듯한 공기

헐떡이다가 그대로 멈춘

 

수국은 수국을 통과하며 말한다

 

하늘에서 엎질러진 구름이 완성한 노래가

나무젓가락에 매달려 반짝이는 동안

구석에 쪼그리고 있던 햇살들이 손수건만 한 경전을 펼쳐 들기도 한다

 

땅속에서 캐낸 태양은 먹기 좋게 식어 있다

붉은 껍질만 잘 벗겨내면

달지 않은 수국 한 송이 꺼내

한 열흘 땅 위의 배고픈 그림자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

 

멀리서 온 바람이 수국을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며 지나간다

 

-수국에 이르다전문, 시집 매혹의 지도중에서

 

 

 

홍수연 : 수국은 선생님이 건설한 꽃의 나라라는 생각이 들어요. 고봉준 문학평론가는 선생님의 시를 사물과 인간,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존재론적 연속성을 사유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인간의 성찰적 태도를 견인한다, 고 하셨습니다. 선생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홍일표 :이 시를 발표했을 때 유안진 선생님께서 좋은 시라며 호평을 해주신 기억이 납니다.매혹의 지도맨 앞에 실린 시이기도 하구요. 이때부터 조금씩 시의 스타일이 바뀌었어요. 저는 늘 시는 최초이면서 최후여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것은 감각이나 사유도 마찬가지고요. 남과 비슷한 시를 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해요. 시인은 항상 신생독립국이어야 하고, 일당 독재이며 제국의 군주여야 한다고 믿어요. 그래야 사물과 세계를 새롭게 읽을 수 있다고 봐요.

 

 

 

 

나비의 날개에 뼈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꽃은 낙하를 결심한다

꽃잎은 공평하게 태양의 마음을 나누어 가진다

 

꽃의 스위치를 작동하는 흰 손이 구름 밖 먼 곳에 있는 건 아니다

 

아무도 소유하지 못했던 바람의 몸에서 뼈를 발라내도

지난 세기의 여진은 남아 핏줄을 타고 돌아다닌다

 

나비가 하나의 풍경에 골몰하여 뿔이 돋아나고

아직 이곳에 오지 않은 빗방울이 그리워질 때

나비의 몸에서 비의 발자국 같은 무수한 빗금이 발견된다

 

허공을 찢으며 폭발한 바람은 복잡한 회로의 머리카락을 타고

마음이 죽은 바위 속으로 밀항을 결심한다

 

숨구멍마다 백 년 전 허공이 눈멀어 살듯

나비는 꽃향기가 오가는 길만 찾아다니다

어느 날 자기도 몰라보는 꽃이 된다

 

돌멩이 같은 허공의 틈새가 조금 더 벌어진다

 

-비상구전문,시집매혹의 지도중에서

 

 

 

홍수연 : “나비는 꽃향기가 오가는 길만 찾아다니다/어느 날 자기도 몰라보는 꽃이 된다저도 이렇게 꽃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그저 이루어지는 일은 없을테지요. 첫 번째 시집 살바도르 달리의 낮달을 지나 두 번째 시집매혹의 지도에 이르러 변모한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홍일표 : 2012문예중앙으로부터 시집을 내겠다는 연락을 받고, 6개월여 동안 원고 정리에 몰두했어요. 그 사이 100여 편의 시를 버렸고, 가리고 추려내어 67편의 시를 묶어 매혹의 지도를 펴냈습니다. 저는매혹의 지도에서 기존의 시적 틀과 내용을 버리고, 미지의 시적 공간으로 이동하고 싶었어요. 매우 낯설었지만 거기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세계가 무한대로 펼쳐져 있었어요. 이것이 변화의 계기가 됐다고 봐야지요. 그리고 시문법이 달라지기 시작한 점에 대해 과거의 제 시를 알고 있던 독자들은 약간 당혹해 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시는 변화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이것은 변화에 따른 자연스런 추이라고 봐요. 올드패션은 익숙하고 편하지만 변화된 새로운 세계를 담보하지 못합니다.시는 무한 번식하는 생물이지 박물관 한 귀퉁이를 장식하는 청동거울이 아니잖아요.

 

 

 

 

온종일 들리지 않는 노래 속에서 뒹굴다가

머뭇거리는 안개의 살을 만져보는데

손발이 없다 얼굴은 뭉개져 소리가 오가던 길도 지워져 있다

 

술잔 밖은 언제나 에로틱하거나 우아한 죽음을 지향한다

아주 단순하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다가 자주 생각의 허리를 부러뜨려 잃어버린 바늘을 찾기도 한다

예민해진 가을숲에서 부러진 빗줄기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만 리 밖에서 울며 걸어오던 비가 어제 죽은 허공의 등줄기를 적신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저곳

빈 동굴은 웅웅거리며 겨울바람의 붉은 마음을 여러 번 곱씹고 있다

 

접히고 구부러지고 다시 펴지는 사이

마음의 뼈에 유리잔의 실금처럼 풀여치가 다녀간 흔적이 남았다

나는 그것을 안개의 미세한 떨림과

그 여자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남긴 한 획의 연민이라고 쓴다

 

저녁이 식은 해를 안고 불의 심장 속으로 들어간다

 

-매혹의 지도전문, 시집 매혹의 지도중에서

 

 

홍수연 : 선생님께 찾아온매혹의 지도는 어떤 모습일까요?

 

홍일표 : 당시 시를 쓰면서 마음에 새기고 있던 것은 혼돈은 시의 성지이며 모태이며 가장 강력한, 시의 기운이 작용하는 곳이라는 거였어요. 무질서의 질서가 살아 용틀임하는 곳이며 새로운 우주 창조의 신열이 가득한 곳으로 언어와 관념이 해체되고 가장 원초적인 생명의 숨결이 살아 붐비는 곳이라고 본 거지요. 시는 따뜻한 아랫목에 있지 않고, 광기와 회의와 혼돈 속에서 퍼덕거리고, 획일화되고 보편화된 일상의 질서 안에서 시는 개화하지 못하고 질식합니다. 버리지도 잘라내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서 시라고 만들어내는 것은 하나의 조립품이거나 올드패션의 한물간 유행가이지요. 수십 년째 같은 노래를 들어야 하는 것은 고문입니다. 안온한 서정을 질료로 쓰는 시는 달고 편안하여 위무의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시의 속성은 본래 위기에 있다고 봐요.극한의 혼란과 위기를 넘어서지 않으면 시의 싹은 발아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도 발견되지 않지요.

 

 

 

 

 

좌판에 쌓여 있던 저녁이 근심한다

 

저녁을 닮아

주름살 깊은 그림자가 한 무더기의 가지를 앞에 놓고

이곳에 없는 노래를 흥얼흥얼 부른다

밤처럼 무거워진 노래가 여자를 석탄 더미로 만든다

 

얼굴 밖으로 넘치는 아침은 금방 시들고

제 몸인 양 바닥의 그림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저녁의 눈이 깊어진다

 

때로는 노래로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부러지고 깨진 어둠의 언저리를 어루만지며

숙성하는 밤의 항아리에 비 젖은 시장 골목을 구겨 넣는다

 

허공 밖을 향하던 좌판 위의 검고 뭉툭한 무기

작심한 듯 끝을 돌려 제 몸을 겨누고

다 식은 밤을 덥석 베어 먹는

,

석탄 더미 같은

 

-역광전문, 시집 매혹의 지도중에서

 

 

홍수연 : “때로는 노래로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누구에게나 이런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노래로 건널 수 없는 강의 시절은 언제였을까요? 혹은 어떤 사건이었을까요?

 

홍일표 : 누구나 그런 일들이 있을 겁니다. 개인적인 일상의 사건도 있지만 저 같은 경우는 특히 문학과 관련된 일들입니다. 저 역시 오랜 무명의 시간을 거치면서 극도의 회의감 속에 무력하게 지낸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자기 색깔을 가지고 정진하다 보면 길이 보이더라구요.성급한 욕심에 인연, 학연, 지연 등을 동원하여 문단 출세를 꿈꾸는 경우도 있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노래로 건널 수 없는 강은 여전히 눈앞에 있습니다.

 

 

 

 

 

새끼줄에서 뱀이 나오는 것을 보는 사람은

벼랑 앞에 선 사람이다

밤을 압축파일로 만들어 벼랑 아래 던져버리는 사람이다

어금니가 흔들린다고 하늘에서 낮달을 뽑아버리는 사람이다

 

뱀이 새끼줄 속으로 들어가 사라지는 대낮

새끼줄은 목이 마르고

죽은 호랑이 몸을 찢고 나온 호랑나비는 철책을 넘어 날아간다

 

새끼줄에서 슬금슬금 뱀 한 마리 기어 나온다

저것이 벼랑을 견디는 모진 방법이라는 것을 아는지

달맞이꽃도 잠시 눈을 감고 저녁의 이마를 쓰다듬는다

뱀이야 하고 소리치면

놀란 새끼줄은 얼른 뱀의 비늘 속으로 숨는다

 

사람들은

수직의 벼랑을 꺾어 식용하는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한다

 

-낙법전문, 시집 매혹의 지도중에서

 

 

홍수연 : 선생님의 시는 참 새롭고 심미적이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습니다. 남다른 상상력 때문일까요? 타고 나신 시인으로서의 자질 때문일까요? 개성이 강하다는 생각이에요.

 

홍일표 : 홀림의 상태에서 찾아오는 시는 세상에 없는 전혀 다른 언어이고, 한 번도 발화되지 않았던 최초의 언어가 됩니다. 들뢰즈의 말대로 예술은 필연적으로 어떤 예기치 않은 것, 인식되지 못한 것,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생산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므로 시는 늘 미답의 지점을 지향하고 인식과 언어가 발 딛지 못한 곳에서 새로운 시는 태어납니다.의도적으로 정산된 의미를 도출하는 시들은 가로세로가 일정한 정형의 언어만 산출합니다. 그러나 의도 밖의 지점에서 나타난 시들은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로 말하고 그 자체로 존재하지요.

 
 

시는 생물이고 내 의지 밖의 어떤 의지에 의해 쓰여진다는 생각을 해요. 완전히 내가 비워지고 시도 뭐도 생각하지 않을 때 어느 날 갑자기 한 순간에 찾아오는 것이 시라고 믿어왔고, 앞으로도 그 믿음에는 변화가 없을 거예요.뚜렷한 목적과 방향을 미리 설정해놓고 쓰는 시를 저는 별로 신뢰하지 않아요. 목적성을 지닌 시의 한계와 도그마를 너무나 많이 보아왔고, 정형화된 틀에 갇혀 한 발자국도 운신하지 못하거나 기존의 시문법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독선과 편견의 논리에도 동의하지 않아요.

그러나 아직도 급속하게 변화하는 현실의 맥락을 읽지 못하고첨단의 시만이 시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단아하고 정형화된 옛 서정시로 회귀하고자하는 일군의 움직임을 봅니다정서의 바탕이 다른 새로운 시들은 읽기 불편하고끝없이 낯선 감각과 조우하는 것이 결코 편하지만은 않겠지만 그 속에 간과하기 쉬운 또 다른 세계가 용틀임하고 있어요혼종과 이질을 통해서 새로운 미학이 태동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홍수연: 시를 쓸 때 피해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홍일표: 시는 질서도 의미도 사상도 아닙니다. 개똥입니다. 굶주린 들고양이며 야생 멧돼지입니다. 야생 멧돼지를 애완견으로 만드는 순간, 시는 죽어버려요. 시는 12가 되고 3이 되는 순차적인 것이 아니고, 1 더하기 12가 되는 뻔한 도식도 아닙니다. 공식도 없고 규칙도 없어요. 제멋대로입니다. 그러므로 스승도 없고 아비도 없는 것이 시입니다.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이고 아비를 만나면 아비를 죽이고 킬킬거리는 것이 시라는 괴물인데 그 괴물을 동물원에 가둬놓고 이미지와 비유, 시의 구조와 운율의 이름으로 괴물을 분해하지요. 그 순간 시라는 괴물은 사라지고 박제된 짐승만 유리 눈알을 박고 살아있는 듯 죽어 있어요. 시 창작 교과서와 시론서를 불태워버리고 잿더미 위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차라리 그것이 시를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읽고 쓸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번갯불의 발화, 그 순간의 감각이 시의 출발이겠지요.

 

 

 

# 화요일 다음에 월요일이 오고, 봄 다음에 겨울이 오는 세계

 

 

 

뱀이 남긴 것은 밀애의 흔적입니다 어디에 가도 꽃의 언저리를 감도는 붉은 숨결입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시냇물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한 마리 뱀으로 당신을 휘감습니다 가끔 반짝이는 웃음소리에 돌들이 물방울처럼 튀어오르고 나는 둥글게 부풀어 오른 만조의 바다가 됩니다

 풀숲을 빠져나간 뱀이 허리띠로 감겨 있습니다 진달래 눈부신 해안선을 들고 봄의 옆구리로 향하던 사랑이었습니다 머리 흰 사내였던가요? 파도를 타고 내달리던 미명의 노래였던가요? 동해를 묶은 길고 눈부신 바닷길에서 풀려나오는 푸른 뱀의 무리를 봅니다 수만 마리 불멸의 젖은 영혼들입니다

 마침내 멀리 돌아온 길이 하늘로 향합니다 밤바다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산과 바다를 지나 슬픔의 곡절 다하는 허공에 닿습니다 온 몸이 붉은 몸부림으로 뜨겁습니다 공중으로 날아간 뱀들이 마른 나뭇가지를 타고 분홍빛 봄비로 내려옵니다 눈 밝은 사행천이 장음의 맑은 곡조로 흘러가는 연록의 들판입니다

      - 사행천전문, 시집밀서중에서

홍수연: 시집밀서의 첫 시입니다. 1시집, 2시집과 달리 보다 서정적이고 사적이며 서사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홍일표:매혹의 지도이후 3년에 한 권씩 시집을 냈습니다. 2012매혹의 지도(문예중앙), 2015밀서(문예중앙), 2018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문학동네), 2021중세를 적다(민음사)를 펴냈지요.

매혹의 지도에서 나름대로 변화를 시도하였고,밀서에서 그 작업이 보다 더 본격화되었습니다. 현실 재현에 충실한 시에 일정한 거리감을 갖게 되면서 제가 모색한 것은 이성과 논리가 가닿지 않는 세계였어요. 명명할 수 없는 무정형의 공간에서 뛰노는 혼돈의 공간이었지요. 화요일 다음에 월요일이 오고, 봄 다음에 겨울이 오는 세계였고, 여러 개의 공간과 시간이 엉클어져 있는 곳이었습니다. 매우 낯설고 기이한 세계였지만 저는 그곳에서 약동하는 미지의 숨결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하고 느껴보지 못한 그곳에 제가 쓰고 싶은 시의 언어가 광맥처럼 숨 쉬고 있었습니다.

시집 밀서를 받아본 한 시인은 시가 내달리듯이 호흡이 빠르고 재빨리 다른 이미지로 이어가는 점을 특이하게 본 듯 싶어요. 저는 대부분 시를 단숨에 쓰는데 매번 홀림의 순간을 경험해요. 간혹 시를 쓰다가 막히거나 더 이상 확장이 안 되면 던져버리지요. 물건이 되기 틀렸다는 판단이 들 때 주저하지 않고 시를 버립니다. 붙잡고 있어봤자 대부분 태작이 되고 만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됐기 때문이지요.

이 시는 2013년에 창작과비평에 발표했던 작품인데 후에 안지영 평론가는 평론집 틀어막혔던 입에서지상에서 시작하여 구불구불거리다가 뜨겁게 공중으로 날아가 분홍빛 봄비가 되어 내려오는 순환 속에서 사물의 사이를 가르는 경직된 경계선은 가볍게 무너진다. 푸르거나 붉거나 진달래 분홍빛이거나 개나리 노란빛이거나 홍일표의 시에는 검은색의 무거운 침묵을 무너뜨리는 찬란함이 있다.”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내 몸에 들어가 있는 밤이 빠지지 않는다 나는 어제의 바람과 어제의 공기에 익숙하여 두 번의 커피를 마시고 49년 전 죽은 한 여자를 만난다 그가 햇빛의 방향을 북쪽으로 돌려놓는 순간 한숨처럼 식어가는 햇빛이 내 등에 꽂힌다

 나는 기침을 하면서 8시간 전 저녁을 열고 들어간 당신의 눈알을 뱉어낸다 등에 꽃힌 햇빛이 유일한 국적이다 국외자의 비자를 가지고 단순한 미래를 통과할 때 사과의 심장이 연쇄적으로 폭발하고 사과꽃은 누군가  찢어놓고 간 벤치 위 흰 적막이다

 여기 없는 당신을 처형하고 나를 처형한다 순서가 바뀌어도 상관없다 지금은 아직 눈이 검은 어제이기 때문이다 눈 앞에 없던 근심과 고독이 외래 식물처럼 혀끝에서 개화한다 나는 밤의 혀를 만질 수 없다

 어제의 입술이 나를 증명하지 않는다 오늘도 나는 여기에 없고 죽음의 손끝으로 붉은 하늘을 벗겨보면 울음 가득한 당신의 심장이다 밤이 올챙이 같은 햇살들을 쏟아놓는 순간 나는 비에 젖지 않는 빗방울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밀서전문, 시집밀서중에서, 8회 지리산문학상 수상작품

홍수연: 8회 지리산문학상을 수상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홍일표 : 이 작품은 지리산문학상 수상작 중 하나입니다. 당시 심사위원(문정희, 이숭원, 권혁웅)들은 심사평에 홍일표의 시를 수상작으로 골랐다. 만장일치였다. 이 시인의 빛나는 이미지와 이미지들의 충돌에서 드러나는 의미의 섬광과 의미들 너머에 숨 쉬고 있는 사유의 크기는 우리 시가 다다른 한 정점이다.”라고 적으셨습니다.

 

 

 

 

태양이 되려고 했던 어느 노인의 말년처럼 호박죽에는 몸에서 빠져나온 몸이 있고 여기가 어디냐고 묻지 않는 혀가 있다 곱게 빻은 돌의 시간과 비바람의 거친 발자국이 녹아 있다 나는 몇 숟갈의 슬픔과 사라진 미풍의 달콤한 전생을 건져 먹는다 미안해요 아직 도달하지 못한 계절이 있나요?

 

둥근 호박이 태양의 뜨거운 눈빛에 설레며 익어갈 때 슬그머니 호박 안에 들어가 잠드는 이방의 남자가 있다 붉은 수염 덥수룩한 야생의 사내가 있다 밤새 호박은 천상과 지상을 뒹굴다가 불쑥 보름달로 떠오르기도 한다 사람들은 달을 호박이라 부르며 조금씩 불행해진다

 

호박죽이 나를 먹고 있다 호박죽의 부드러운 혀가 내 몸을 감싼다 이건 사라진 손에 대한 아득한 기억이다 고마워요 나는 천 원짜리 지폐처럼 중얼거리며 서서히 녹는다 모서리 없는 죽처럼 무한히 둥근 미풍이 될 때까지 나는 황금의 숨결로 설레며 노랗게 웃는다 빈 그릇이 서둘러 나를 비운다

 

- 밀행전문, 시집밀서중에서

​​

홍수연: 문학평론가 조재룡은 선생님의 시를 역치의 문법이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시를 그림에 비유하자면 살바도르 달리의 화풍이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항상 제겐 어떤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아직 도달하지 못한 계절은 무엇을 말씀하심인지요?

 

홍일표: 살바도르 달리뿐만 아니라 마그리트, 잭슨 폴록의 회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직 도달하지 못한 계절은 미지, 미답의 자리겠지요.

 

 

 

 

비닐봉지가 떠다니는 물속은 새의 망명정부이다 나는 물의 살점을 떼어내 연명하는 물총새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의 지루한 정면을 부수어 강을 건너고 산을 넘는 것이다 도중에 손발이 사라지는 것은 예사이지만 사라지는 만큼 몸에서 수천의 손발이 돋아나 아침의 핵심에 닿는다

 

새가 물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날개가 사라진다 지느러미만 남아 새를 기억하고, 탐닉했던 구름의 문장을 뽀글뽀글 떠올리며 물속으로 또 다른 새들을 유인한다 겁 없이 달려들던 빗방울들은 물속에 최후의 진술을 짧게 남긴다 실패한 혁명은 언제나 흑백의 바둑알 같은 무수한 눈들을 낳는다

 

물속에서 부화하지 못한 한 마리 새다 해파리 같기도 하고 계란프라이 같기도 한 지난한 주름의 역사이다 구겨졌다 펴지고 펴졌다 구겨지는 망명정부의 밀실에서 뛰쳐나가는 파도를 본다 주둥이가 파란 부정형의 새를 본다 젖은 비닐봉지가 바닥에 붙어 날아간 새를 결심하는 동틀 녘이다

 

- 전문, 시집밀서중에서

 

 

홍수연: “사물의 지루한 정면을 부수어 강을 건너고 산을 넘는 것이다저는 이 구절이선생님의 시를 적확하게 정의한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소 시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시의 철학은 무엇인지요?

 

홍일표: 이미지, 구조, 운율, 의미 등을 잘 갖추어 모범정답처럼 어디 하나 흠 잡을 곳 없는 시가 아니라 폭발적 상상력으로 질주하는 야생마 같은 시, 원시적 생명력을 내장한 뜨겁고 치열한 시, 그리하여 언어 너머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시를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 시는 일탈의 언어이고, 늘 다르게 출발하는 언어입니다.

 

 

 

나는 부풀어 무명의 신에게 닿는다

얼굴 없는 나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여

달의 종족이거나

오리알쯤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몸을 떼어 몇 개의 알을 더 낳기도 한다

이미 죽어서 지워진 몸

용서라는 말은 하지 말자

당신을 만나는 동안 작은 속삭임으로 신의 귀를 간질인다

시간의 악몽을 통과하는 잠

어둠으로 빚은

세계의 모퉁이에 부딪힌 빛들이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이곳에서 저곳까지 길이 없으니

나는 아직 까막눈이고

하느님도 보지 못한

희고 둥근 시간의 덩어리들

꽉꽉 눌러 사라진 꽃의 표정을 찾는다

여기저기 귀들이 펄럭인다

입이 돋는다

목련이 오래 감추어둔 혀를 내밀어 종알거리듯

곳곳에서 부풀어오르는

환한 살풍선들

제 말이 들리나요

밀가루 반죽 속에서 동글동글 태어나는 목소리들

나는 여전히 뜨겁고 캄캄한 살이어서

거듭 달의 종족이라고 불러본다

그래야 오늘도 말랑말랑한 하느님인 것

빵이라 부를 때 당신은 영영 보이지 않으니

         -전문, 시집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중에서, 문학동네, 2018

홍수연: <시인은 노래하는 존재라는 상식적인 믿음과 달리 홍일표에게 시인은 노래를 듣는 자또는 읽는 자이다. 그것은 누구의 노래인가? 누가 노래하는가? ‛사물이다.> 라고고봉준 문학평론가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집매혹의 지도의 자서(대상과의 깊은 교유는 곧 귀신을 만나는 일이고, 단 한 번도 감각하지 못한 생의 숨결에 온몸이 젖는 것이다.)와도 일맥상통하는데요. 저는 선생님의 시에서 자주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낯선 매혹 때문인 것 같아요. 선생님의 첫 문장, 시적 발화는 어떤 순간에 오는 것일까요?

 

홍일표: 번갯불의 발화, 그 순간의 감각이 시의 출발이겠지요.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무정형의 에너지가 폭발하는 찰나입니다.

 

남몰래 흐느낀다 너는

입도 입술도 없이

보이지 않아서 더 아픈 때가 있다

아무 말 못하고 혼자 숨어 우는

사람이 있다

자작나무의 얼굴로

물안개의 젖은 숨결로

밤이 깊어 너의 입술에 도달한 차갑고 뜨거운 속엣말들이 치자꽃처럼 핀다

흰 달빛의 표정으로

어디에도 없는 너는

얼굴을 지우고 머리칼을 지우고

말의 가장 먼 바깥에서 은밀히 휘발하는 비애처럼

소리를 죽이고

마음의 색깔도 지우고

이제는 다 놓아버린 물의 감정들

오직 투명함으로 너는 조용히 일어서서 걸어간다

이슬의 어깨가 파르르 떨고

공기의 입술에 얹어놓은 이름이 휘파람처럼 사라지는

아무도 모르는 곳

몸 밖의 어디 먼 곳에 물의 신전이라도 있는 듯

맑고 가벼운 날개, 파아란 눈빛 하나로 찾아가는

아스라이 먼

모든 슬픔의 정결한 성지

가슴 한 쪽 없는 이들이 그림자를 끌고 혼령처럼 찾아가는

      -알코올전문, 시집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중에서, 문학동네, 2018

홍수연: 저는 미래에는 누구나 시인이고 소설가가 되어 1인 출판으로 수많은 책이 쏟아져 나올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외국처럼 등단제도도 없어지고 자신의 책으로 평가받는 시대가 오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인은 많고 매일 수많은 시가 넘쳐나는 활자의 홍수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시인은 어떤 책임감을 가지고 시를 써야 할까요?

 

홍일표 :시는 자유입니다. 어떤 목적이나 책임감에 휘둘리는 순간, 시는 죽습니다. 시는 시일뿐입니다. 누구의 눈치를 볼 것도 없고, 의무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시는 늘 미지의 영역을 내달리는 야생의 짐승입니다.

 

 

 

어제 혼자 부른 노래가 저녁을 끌고 도착하는 곳마다 뚱단지꽃이 핀다 나는 힘들다고 말하지 않아서 더 힘든 바위를 이해하는 중이다 그럴 것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가문비나무는 줄기마다 길고 오래 누군가를 울고 있는 것이다

사형수의 얼굴이 먹구름 속에서 일그러지는 동안 검은 염소가 새끼를 낳는다 공중의 살이 찢어지고 동쪽의 숨구멍이 열린다 나는 젊어서 죽은 몇몇 시인들을 호명하면서 얼어붙은 달을 녹이고, 죽은 이파리들은 부스럭거리며 입에 문 마지막 말들을 내려놓는다

이제 어디로 가나 갈 곳이 없는 길 끝에서 폭죽이 터지거나 춤으로 타오르는 불길을 보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밤이 지나가고, 야행성 짐승들이 어둠을 뜯어내며 말한다 무슨 소리냐고 어느 나라 말이냐고 너는 말도 문장도 아니라고 머리도 꼬리도 없는 짐승이라고 야수라고 아주 먼 어느 나라의 입이 없는 독백이라고

     -일인극전문, 시집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중에서, 문학동네, 2018

홍수연: “무슨 소리냐고 어느 나라 말이냐고 너는 말도 문장도 아니라고 머리도 꼬리도 없는 짐승이라고 야수라고 아주 먼 어느 나라의 입이 없는 독백이라고시구에서 볼 수 있듯이 시에 대한 어떤 자괴감 같은 것도 엿볼 수가 있습니다.

홍일표: 소통의 한계에 직면했을 때 겪는 자괴감입니다. 오늘날의 시의 운명 같기도 하구요. 저는 중층 구조’, ‘겹의미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액면 그대로 다 보여주는 시는 재미없어요. 누구나 뻔히 다 아는 얘기를 중언부언하는 것도 싫고요.시는 일탈의 언어이고, 늘 다르게 출발하는 언어입니다.

 

 

 

히아신스를 번역하는 일로 일생을 보낸 늙은 학자의 머리칼을 누가 번역하나 몸을 번역하여 끄집어내는 머리올은 가늘고 긴 백색의 문장, 아무리 살펴봐도 글자 하나 남아 있지 않은

구름에 복무한 몸은 지워지고, 천둥 번개를 삼킨 공중과 히아신스를 잡고 있던 손가락은 어디 있나

히아신스가 있긴 있었나 상가를 다녀온 날 검은 머리카락이 평생 중얼거린 말을 한 줄로 요약하는 거미를 본다 흰 거미줄에 이슬방울 하나 걸어놓고 어딘가에 크고 둥근 세계가 있다고 몸을 흔들면서

얼음을 따라가다 종점 근처에 빈 막대기로 서 있는 아이처럼 얼음은 어디에도 없고, 매미 우는 소리에 뜨겁게 달구어지는 햇살은 또다른 오역, 오역의 눈부신 한때였나

히아신스는 히아신스를 떠나고, 늙은 학자의 몸을 번역한 최종본은 소나무숲을 덮은 적설, 솔잎에 얹힌 눈의 무게만큼 밤은 왜 무거워지나 한쪽 눈을 찡그리고 봐도 토씨 하나 보이지 않는

  -오역전문, 시집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중에서, 문학동네, 2018

홍수연: “히아신스를 번역하는 일로 일생을 보낸 늙은 학자가 선생님의 페르소나처럼 읽힙니다.

<모든 시인은 “히아신스를 번역하는 일로 일생을 보낸 늙은 학자의 머리칼을 누가 번역하나라는 고뇌 섞인 물음처럼 번역 불가능한 것을 번역해야 하는 불가능의 운명을 몸으로 살아내는 존재이다. 홍일표의 시는 이 불가능한 번역에 봉헌된 오역의 언어이고, 지금-이곳의 언어로는 기록될 수 없는 낯선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홍일표의 시는 미지의 시간을 불러들여 현재의 시간을 탈구시키고, 언어 바깥의 비언어적 경험을 통해 관습화된 언어를 해체-구성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바깥의 언어로 쓰여진 이야기이다> - 문학평론가 고봉준

바깥의 언어에 대하여 첨언을 부탁드립니다.

 

홍일표: 좋은 시는 언어 이전의 언어이거나, 언어 너머의 언어입니다. 관습화된 언어를 넘어서지 않고는 시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언어 바깥의 비언어적 경험, 언어화되기 직전의 에너지입니다.

 

 

 

시는 어느 날 갑자기 앞에 나타난 외계의 눈부신 빛이고 황홀이지요.

 

 

 

 

# 매혹의 지도는 도처에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시의 눈입니다.

 

 

눈앞의 풍경이 모호해서

이곳에 없는 이름을 지어 불렀다

새로 출발한 풍경이라고 말하자

새로 날개가 돋은 바람이라고 부르자

하늘에서 실패한 구름들이 어슬렁거리며 마을 가까이 내려온다

지상이 우아하게 구부러지고

다시 모호 속으로 잠입할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될 때

공중에서 두 개의 무덤을 발굴한 아이들이 다급하게 소리친다

여기에 낙타가 있다고

낙타를 매장한 쌍분이 있다고

돌멩이처럼 결심한 사람들은 사다리를 타고 공중으로 올라간다

구름을 이해한 낙타는 없고

폭설로 사방의 길이 막힌 날

전송도 계약도 중단된 날

내 안의 숨어 있던 낙타가 걸어 나온다 오지의 자생식물처럼

이름도 학명도 모르는

눈 밝은 태양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 낙타전문, 시집중세를 적다중에서, 민음사, 2021

홍수연: “내 안의 숨어 있던 낙타가 걸어 나온다 오지의 자생식물처럼/이름도 학명도 모르는/눈 밝은 태양이 한 번도 본 적 없는위의 시를 저는 시의 어떤 전환점 내지는 선생님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눈 밝은 태양이 한 번도 본 적 없는어떤 새로운 시적 자아의 출현으로 읽었습니다. 혹은 우리들 내면 깊숙한 곳에 내재되어 있는 어떤 자아를 이끌어내기 위한 마중물 같은 시라고나 할까요?

홍일표: 맞습니다. 시는 생물이고 내 의지 밖의 어떤 의지에 의해 쓰여진다는 생각을 해요. 완전히 내가 비워지고 시도 뭐도 생각하지 않을 때 어느 날 갑자기 한 순간에 찾아오는 것이 시라고 믿어왔고, 앞으로도 그 믿음에는 변화가 없을 거예요. 정형화된 틀에 갇혀 한 발자국도 운신하지 못하거나 기존의 시문법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독선과 편견의 논리에도 동의하지 않아요. 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밤을 활짝 펼쳐보면

등이 굽은 검은색 우산들

날개가 있지만

한 번도 날아 보지 못한

검게 닫힌 심장들

벽시계는 여전히 11시에 멈춰 있고

죽은 시인의 일기장에서 흘러나오는 밤의 기록들

살아도 산 것이 아니어서

시커먼 진흙 덩어리로 숨 쉬다가

마지막으로 내쉰 호흡이 검은 우산으로 부풀어 오른 것

아침은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오가는 사람들이 툭툭 발로 차고 다녀도

어제를 모르는 짐승처럼 죽은 척하고 있다

팽팽하게 부풀었던 심장을 접고

웅크리고 있는 밤

새도 아닌 것이

알도 아닌 것이

안경 쓴 빗방울들이 거꾸로 매달려 밤의 안쪽을 들여다본다

한 장 한 장 어둠의 책갈피를 넘기던 사람들

오래 접어 두었던 아침을 펼쳐 들고 거리로 나선다

낮의 입구로 밀고 들어가는

해머처럼 단단한 검은 밤의 덩어리

오랫동안 달의 종족으로 살아서

죽은 적도 없고

떠난 적도 없는

     -서쪽의 우산전문, 시집중세를 적다중에서, 민음사, 2021

 

홍수연: “한 번도 날아 보지 못한/검게 닫힌 심장들” “살아도 산 것이 아니어서/시커먼 진흙 덩어리로 숨 쉬다가” “새도 아닌 것이/알도 아닌 것이곳곳에 중세의 이미지가 잘 나타나 있는 것 같습니다. 시집 중세를 적다에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요?

홍일표:중세를 적다는 올 1월 민음사에서 나온 시집 제호이기도 한데, 이 시는 지난해 9월 정읍 산외면에 있는 고택문화체험관 집필실에 머물면서 쓴 작품입니다. 그 무렵 중세의 이미지에 붙들려 있던 저는 무엇에 홀린 듯 거의 단숨에중세를 적다를 썼어요. 써놓고 나서도 한동안 먹먹했지요. 시는 어느 날 갑자기 앞에 나타난 외계의 눈부신 빛이고 황홀이지요.중세를 적다는 그렇게 저에게 왔어요. 일부의 독자들은 웬 중세냐고 묻는데, 제 시의 중세는 특정한 과거의 사건이나 정황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구 곳곳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을 말합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이곳이 중세가 아닌가하고 가끔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숨죽이며 오가던

발자국이 지워진 걸음들

한순간 타다닥 불꽃이 깨어난다

누군가 여러 사람의 죽음을 재빨리 꿰매고 있는 것 같다

옷 속에서 이불 속에서

은신하고 있던 파르티잔

손닿는 곳마다

고압의 눈빛이 반짝인다

죽은 줄 알았던

사라진 줄 알았던

격정의 날카로운 시선에 흠칫 놀란다

돌아서면 이미 너는 보이지 않는다

흔적도 마지막 말도 남기지 않고

일순의 생을 마감한다

다만 암호처럼 반짝

피었다 지는 꽃

깨진 유리잔이나

찢긴 몸에 숨어 살던

미처 다 부르지 못한 이름들,

가까이 다가가면 고압의 전류가 마른 혀를 화들짝 깨어나게 하는

덥석 손을 잡는다

꽃의 방향으로 몰려드는 단문의 소식들

젖은 몸에서 여러 마리의 새들이 파다닥 날아오른다

하늘에선 어둠을 이해한 샛별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숨은 천사전문, 시집중세를 적다중에서, 민음사, 2021

 

홍수연: “어둠을 이해한 샛별이야말로 숨은 천사가 아닐까요? 천사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어둠을 이해하고서도 반짝일 수가 있을까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새를 날아오르게 하는 이 시대의 숨은 천사는 누구일까요?

홍일표: 새로운 감각의 영지에 거주하는 시이거나 시의 혈족들이겠지요.

 

 

 

어느 낯선 거리였네

무쇠로 만든 소를 끌고 가고 있었네

얼핏 황금으로 만든 소 같기도 했네

 

벌레에 쏘여 부푸는 살갗을 보면서

정직한 슬픔의 도약을 읽네

맨발로 서성이는 저녁을 데리고 가는 늙은 손

어느 골목인지

어느 담벼락 아래인지

돌아보면 한때 나를 불러 일으켜 세우던 마른 수수깡 이파리였네

 

불붙은 심장이 내달리던 거리였네

햇볕이 파도치던 광장이었네

언어가 불타고

문자가 불타고

불덩어리로 날아올라 공중을 폭파시키는 몸이었네

공중에 숨어 있던 색색의 꽃들이 고백하던 날들이었네

 

날마다 무쇠소를 통째로 삼켜서

마음속에 들끓는 날벌레 같은 문자들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아서 하늘이 버린 음표들

 

소도 아니고 생물도 아닌 것을 끌고 다니면서

애초부터 없던 소를 팔겠다고 쾅쾅 문을 두드렸네

 

-낮꿈전문, 시집중세를 적다중에서, 민음사, 2021

 

 

홍수연: 선생님의 자화상 또는 이 시대 우리들의 자화상을 봅니다.

 

홍일표: 돌사자의 포효는 언어이며 동시에 언어가 아닙니다.

 

 

 

 

주천강은 안개를 진술 중이다

크고 작은 돌을 번갈아 던져도

안개는 모호한 문장

능멸과 오욕의 강을 건너온 자의 발이 사라지고

얼굴도 지워지고

글자 하나 보이지 않아서 마침내 돌아서는 사람들

 

그들은 말한다

너무 잘 보여서 쉽게 손에 잡히던 돌, 나무,

이목구비 또렷한 형상들을 몸 안에서 끄집어내 몇 개의 단위와 기호로 나누는

그것이 세계를 건축하는 구조물이라고

 

안개는 수시로 삭제한다

해마다 새 물감을 풀어 쓰는 봄이 그렇듯

그의 긴 문장은 언제나 수사학의 바깥에서 출발하여

불이 붙지 않는 젖은 나무와 마른 풀잎 곁에서 밀어를 나눈다

 

지우고 새로 쓰는 안개의 필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동자들이 미립자로 흘러 다니는 강가에서 나는 자주 실종된다 나를 놓친다 손을 휘저어도 내가 잡히지 않아서

 

나는 물방울이 되고 안개가 되어 떠도는 중이다

 

- 전문, 시집중세를 적다중에서, 민음사, 2021

 

 

홍수연: 선생님의 시는 시적대상과의 완전한 물아일체의 순간에 탄생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그 시적대상에 완전히 녹아서 없어지는 거죠. 그런매혹의 지도는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홍일표: 강원도 횡성에 있는 예버덩에서 쓴 시입니다. 주천강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를 보면서 시의 언어에 대해 곰곰 생각하게 됐지요. 매혹의 지도는 도처에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시의 눈입니다.

 

 

 

홍수연: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다시 한 번 더 감사드리며, 마지막으로앞으로의 계획과 확장하고 싶은 시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요? 이 자리를 마무리하면서 독자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나 선생님의 문학에 대해서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실까요?

 

홍일표 : 시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은 모든 시인들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젊은 시인들의 임무가 막중하지요. 기대했던 시인들이 너무 쉽게 정형화된 세계에 안착하는 것을 볼 때마다 많은 아쉬움을 느낍니다. 좀 더 폭발적인 시의 향연을 보고 싶습니다. 시는 언제나 도착의 언어가 아니라 출발의 언어니까요. 나머지 말은 얼마 전 모 잡지에 발표 한 산문으로 답을 대신하겠습니다.

어제의 너에게 발목 잡히지 마라. 폐기하고 부정하지 않는 한 새로운 감각의 영지는 열리지 않는다. 피하고 도망치는 한 비슷하게 닮아가며 비슷한 문법으로 비슷한 시간을 산다. 혼돈의 중심에 이르면 기존의 언어와 관념은 해체된다. 그 순간의 강력한 에너지와 우주적 기운에 감전된 적이 있는 사람은 충일한 생의 경험에 전율한다. 찰나의 매혹은 전신을 훑고 지나가고, 온몸을 떨게 하는 희열은 생의 양식이며 동력이 된다.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는 155년 전 화법으로 말한다.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취하라고. 랭보와 바디우 또한 거듭 말한다. 익숙한 일상의 지옥에서 사랑을 재발명하라고. 그리하여 온몸으로 위험과 모험 속에서 감춰진 오의를 만나라고.”

 

 

 

 

인터뷰 내내 웅혼한 우주의 말을 받아 적으며, 콩닥콩닥 가냘프게 떨고 있는 미지의 새 한 마리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올해 출간한 시인의 시집중세를 적다의 시인의 말과 시집 살바도르 달리풍의 낮달의 자서를 인용하며 긴 인터뷰를 마치고자 한다.

 

<일체의 만상이 허상으로 흩어지는 중에 나는 외뿔인 것이고 빈방에 흘러든 달빛을 무연히 바라보면서 익명의 달빛으로 점점 희미해지고 희미해지다가 다시 일어나 무용(無用)이 대용(大用)임을 헤아리다 보면 사유의 도식을 초과한 에너지들이 넘실거리는 새벽에 당도하여 시 한 편 받아 적는 것인데 그러한 나날을 서늘하고 지극한, 시간 밖의 시간이라 하겠다.>

 

 

 

시여, 늙지 마라.

가는 길이 많이 적막해도

늘 낯선 길 위에 서 있기를

-시집 살바도르 달리풍의 낮달자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빈 그릇에 담긴 것은 다 식은 아침이거나 곰팡이 핀 제삿밥이었다 콜로세움의 노인도 피렌체의 돌계단 아래 핀 히아신스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다시 보지 못한다는 것은 유적의 차가운 발등에 남은 손자국만큼 허허로운 일이나 한 번의 키스는 신화로 남아 몇 개의 문장으로 태어났다 불꽃의 서사는 오래가지 않아서 가파른 언덕을 삼킨 저녁의 등이 불룩하게 솟아올랐다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지상의 꽃들은 숨쉬지 않았다 눈길을 주고받는 사이 골목은 저물고 나는 입 밖의 모든 입을 봉인하였다 여섯시는 자라지 않고 서쪽은 발굴되지 않았다 삽 끝에 부딪는 햇살들이 비명처럼 날카로워졌다 흙과 돌 틈에서 뼈 같은 울음이 비어져나왔다 오래전 죽은 악기였다 음악을 놓친 울림통 안에서 검은 밤이 쏟아져나왔다 나는 다만 노래를 가지러 왔다.

 

-악기전문, 시집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중에서, 문학동네, 2018

 

 

 

 

홍일표 시인

1988년 심상신인상, 1992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시집 살바도르 달리풍의 낮달』 『매혹의 지도』 『밀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중세를 적다청소년시집 우리는 어딨지?평설집 홀림의 풍경들을 펴냈다. 지리산문학상, 시인광장 작품상 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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