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거룩”, 문성해 시인과의 인터뷰

홍수연기자 | 기사입력 2020/11/24 [11:21]

“나의 거룩”, 문성해 시인과의 인터뷰

홍수연기자 | 기사입력시간 : 2020/11/24 [11:21] | 조회수 : 29

 

▲     ©한국예술문화타임즈

 

〔문단소식〕“나의 거룩,  문성해 시인과의 인터뷰

 

 

생활이 내게로 와서 벽을 이루고 / 지붕을 이루고 사는 것이 조금은 대견해 보인다 /

태풍 때면 유리창을 다 쏟아 낼 듯 흔들리는 어수룩한 허공에 / 창문을 내고 변기를 들이고

방속으로 쐐애쐐애 흘려 넣을 형광등 빛이 있다는 것과 / 아침이면 학교로 도서관으로 사마귀 새끼들처럼 대가리를 쳐들며 흩어졌다가 / 저녁이면 시든 배추처럼 되돌아오는 식구들이 있다는 것도 거룩하다

                                                     시인의 시「나의 거룩」에서

 

           

 

 

 

 시인은 오래전 내가 몸담고 있었던 시 모임에서 자주 회자되는 시인 중 한 명이었다. 시인의 부군 또한 시인이며 시인이 전업시인이라는 것, 시를 쓰기 위해 하루 6시간씩 지하철을 탔다는 등 시인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전설처럼 시 밴드를 떠돌았다.  

 

 내가 처음 접한 시인의 시는「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였다.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서너 달이나 되어 전화한 내게

언제 한번 이나 먹자고 할 때

나는 보다 못한 인간이 된다

밥 앞에서 보란 듯 밥에게 밀린 인간이 된다

그래서 정말 밥이나 한번 먹자고 만났을 때

우리는 난생처음 밖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처럼

무얼 먹을 것인가 숭고하고 진지하게 고민한다

 

결국에는 보리밥 같은 것이나 앞에 두고

정말 밥 먹으러 나온 사람들처럼

묵묵히 입속으로 밥을 밀어넣을 때

나는 자꾸 밥이 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밥을 혀 속에 숨기고 웃어 보이는 것인데

그건 죽어도 밥에게 밀리기 싫어서기 때문

우리 앞에 휴전선처럼 놓인 밥상을 치우면 어떨까

우연히 밥을 먹고 만난 우리는

먼산바라기로 자꾸만 헛기침하고

왜 우리는 밥상이 가로놓여야 비로소 편안해지는가

너와 나 사이 더운 밥 냄새가 후광처럼 드리워져야

왜 비로소 입술이 열리는가

으깨지고 바숴진 음식 냄새가 공중에서 섞여야

그제야 후끈 달아오르는가

왜 단도직입이 없고 워밍업이 필요한가

오늘은 내가 밥공기를 박박 긁으며

네게 말한다

언제 한번 또 이나 먹자고

 

             (시집『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

 

         

 시인의 시엔 유독 밥()이 많이 등장한다. 올해 9월 출간한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내가 모르는 한 사람』을 살펴보자.

 

 

바구미를 죽이는 밤

 

 

처음엔 작은 활자들이 기어 나오는 줄 알았다

신문지에 검은 을 붓고 바구미를 눌러 죽이는 밤

턱이 갈라진 바구미들을

처음엔 서캐를 눌러 죽이듯 손톱으로 눌러 죽이다가

휴지로 감아 죽이다가

마침내 럭셔리하게 자루 달린 국자로 때려 죽인다

죽임의 방식을 바꾸자 기세 좋던 놈들이 주춤주춤,

죽은 척 나자빠져 있다가 잽싸게 도망치는 놈도 있다

놈들에게 뇌가 있다는 것이 도무지 우습다

 

혐오도 죄책감도 없이

눌러 죽이고 찍어 죽이고 비벼 죽이는 밤

 

그나저나 살해가 이리 지겨워도 되나

고만 죽이고 싶다 해도 기를 쓰고 나온다

이깟 것들이 먹으면 대체 얼마나 먹는다고

 한 톨을 두고 대치하는 나의 전선이여

아침에는 학습지를 파는 전화와 싸우고

오후에는 종이박스를 두고 경비와 실랑이하고

밤에는 하찮은 벌레들과 싸움을 한다

 

누가 등이 딱딱한 적들을 내게로 내보낸다

열기와 적의로 환해지는 밤,

누군가 와서 자꾸만 내 이불을 걷어 간다는 생각,

자꾸만 내게서 양수 같은 어둠을 걷어 간다는 생각,

날이 새도록 터뜨려 죽이는 이 어둠은 가히 옳은가

 

 

 

혼자 먹는 밥

 

 

건너편에

먹는 법을 잊어버린 귀신 하나

덩그러니 앉혀 놓아도 좋겠지

 

물풀을 다 걷어 낸 모시조개처럼

찬 한 개로 먹는

스스로 소금기가 배어 있다

 

푸른곰팡이 부대가 닥치기 전

잠시 내게로 들른 이 밤을

들판에서 주운 살점인 양 느긋이

몸에 숨겨 주는 아침,

 

움푹 꺼진 눈의 귀신 하나

맞은편에 앉히고

또 누가 홀로 밥사발로 독대하는지

아파트 어디선가

밥그릇 긁는 소리가 난다

 

숟가락 소리가 깊어지면

몸속의 여물통에도

반짝이는 사리가 찬다

 

()의 시

 

 

연밥이 못물에 다 처박혀 있다  

밥그릇을 엎고 도망친

일가(一家)처럼,

 

폐가만 폐가가 아니더라

꽃이 설 때는

꽃잎이 벽돌 한 장 한 장처럼 더디더니

꽃이 질 때는

해머로 벽을 허물듯 스러지더라

 

입안에 밥풀을 씹으며

도망치는 식솔들처럼

물 위에도 얼룩덜룩 꽃의 체취가 남아

연꽃 우려낸 못물이

못 둑까지 번진다

 

 

 살아내기 위해서 누구에게나 밥은 절대적인 것이며, 이 한 공기 밥을 쟁취하기 위해 우리들은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매일 피 흘리며 살고 있다. 모두가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한 탓에 세상은 더욱 황막해지고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의 시초도 이 한 그릇 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열거한 시편들에서 살펴본 시인의 밥은 거룩한 생활의 전부인 듯 보인다.(이 땀내 나는 밥 앞에선 누구도 초연할 수 없다.)

 

 평생 먹고 또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밥일 것이다. 더운 밥 한 그릇 구하고자 매일 전쟁 같은 삶을 견디고 있는 우리들과 달리 시인은 스스로 세상의 거룩한 밥이 되고자 한다. 자신을 던져 가족을 살찌우고 세상 곳곳에 숨겨진 삶의 비의를 캐내어 삶에 지친 우리들에게 정갈하고 맛있는 밥상을 펼쳐 보인다. 염낭거미처럼 자신을 던져 세상을 살찌우는 텅 빈(꽉 찬) 호구가 되고자 하는 시인을 아이들이 등교한 후, 부군과 함께 매일 손 꼭 잡고 산책한다는 일산 호수공원 부근에 위치한 스타벅스에서 만났다.

 

 

《대표시 모음》

 

 

자라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던

 

하얀 손의 그 임자

 

취한醉漢의 발길질에도

고개 한번 내밀지 않던

 

한 평의 컨테이너를

등껍질처럼 둘러쓴

 

깨어나보면

저 혼자 조금

호수 쪽으로 걸어나간 것 같은

 

지하철 역 앞

토큰 판매소

 

오늘 불이 나고

보았다

 

어서 고개를 내밀라 내밀라고

사방에서 뿜어대는

소방차의 물줄기 속에서

 

눈부신 듯

조심스레 기어나오는

꼽추 여자를

 

잔뜩 늘어진 티셔츠 위로

자라다 만 목덜미가

서럽도록 희게 빛나는 것을

 

         (시집『 자라  )

 

 

나의 거룩

 

 

이 다섯 평의 방 안에서 콧바람을 일으키며

갈비뼈를 긁어 대며 자는 어린 것들을 보니

생활이 내게로 와서 벽을 이루고

지붕을 이루고 사는 것이 조금은 대견해 보인다

태풍 때면 유리창을 다 쏟아 낼 듯 흔들리는 어수룩한 허공에

 

창문을 내고 변기를 들이고

방속으로 쐐애쐐애 흘려 넣을 형광등 빛이 있다는 것과

아침이면 학교로 도서관으로 사마귀 새끼들처럼 대가리를 쳐들며 흩어졌다가

저녁이면 시든 배추처럼 되돌아오는 식구들이 있다는 것도 거룩하다

내 몸이 자꾸만 왜소해지는 대신

어린 몸이 둥싯둥싯 부푸는 것과

바닥날 듯 바닥날 듯

되살아나는 통장잔고도 신기하다

몇 달씩이나 남의 책을 뻔뻔스레 빌릴 수 있는 시립도서관과

두 마리에 칠천원 하는 세네갈 갈치를 구입할 수 있는

오렌지마트가 가까이 있다는 것과

아침마다 잠을 깨우는 세탁집 여자의 목소리가

이제는 유행가로 들리는 것도 신기하다

하루가 멀다하고 닦달하던 생활이

옆구리에 낀 거룩을 도시락처럼 내미는 오늘

소독 안 하냐고 벌컥 뛰쳐 들어오는 여자의 목소리조차

참으로 거룩하다

 

           (2020. 시집 『내가 모르는 한 사람』)

 

 

• 반갑습니다. 호수공원은 꼭 한 번은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시인님 덕분에 이렇게 와보게 되네요. 풍광이 참 아름다운 곳이에요.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쭙고 싶은 말씀이 많은데요. 우선, 유종인 시인님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연애사가 무척 궁금합니다.(웃음)

 

• 네 저도 무척 반갑습니다. 일산호수공원 곁에 산지도 벌써 십년이 넘었네요. 매일 만나도 늘 새롭고 궁금한 곳이 이곳입니다. 구석구석 아름답지 않은 곳이 한 군데도 없을 만큼 수려한 곳이죠. 이제는 저 혼자만 아는 비밀의 장소도 생겼을 정도입니다. 남편과는 등단하고 나서 만났어요. 처음에는 전화 목소리만으로 데이트를 했는데 통화료가 너무 많이 나와서 엄마한테 혼나기도 했어요. 얼굴도 궁금하고 해서 서울에서 만나기로 한 게 첫 통화 후 3개월 후쯤 되었을 거예요. 첫인상은 어수룩하고 숫기도 없고 촌스럽고 그랬는데 그런 부분에 끌린 거 같아요. 그리고 자꾸 만나다 보니까 조금씩 더 좋아지게 되었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죠.

 

 

 시인님의 시집 『내가 모르는 한 사람』은 제가 최근에 읽은 시집 중 가장 맛있고, 읽는 재미가 월등한 시집이었어요. 시집의 마지막장을 조용히 덮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 시집에 기대어 또 한 번 제 삶을 횡단할 수 있겠구나, 하는... 좋은 시집이란 아름다움을 선사하거나 독자들에게 삶의 용기와 희망을 주는 시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제가 유독 생활시를 좋아하는 까닭도 있겠지만, 시인님의 청빈한 삶에서 엿볼 수 있는 투명한 아름다움에 매혹되어서인 것 같습니다. 시인님의 어렸을 적 꿈은 무엇이었으며,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요?

 

 

•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저의 시를 읽고 몇 몇 분이라도 제 시에 공감을 하고 (살아갈 힘까지는 아니더라도) 잠시라도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구요. 맛있고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그 어떤 말보다도 감사해요. 저의 어렸을 때 꿈은 화가가 되는 것이었어요. 밤을 새워가며 고흐나 이중섭의 그림을 따라 그리기도 하고 화가들의 사생활이 나오는 책을 읽기도 하면서 화가의 꿈을 키웠지요. 그런데 미대를 가기에는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화가가 되는 꿈을 접어야 했어요. 그럼, 돈이 안 드는 예술은 뭘까? 고민하다가 연필 하나로 할 수 있는 작가가 되기로 했지요. 그 때부터 소설을 읽고 쓰고 하면서 작가의 꿈을 키웠지요. 소설가가 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엉덩이가 가벼운 저로서는 소설보다는 시가 맞아 시인이 된 것 같아요. 화가가 못되었기 때문인지 지금도 화가들을 보면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부러운 눈으로 돌아보고는 하죠.(웃음)

 

 

 

공터에서 찾다

      -공터에서 페트병을 물어뜯는 개를 본다, 나의 턱뼈가 얼얼해짐을 느끼는 저녁

 

 

뭐 이렇게 질긴 고기가 다 있을까

좀체 속내 보이지 않는 것이 의뭉스런 애인 같다

어딘가에 분명 뼈를 감추고 있을 거야

고기의 진미 희망의 정수(精髓) 아아,

뼈다귀를 향하여 나아가는 일이란 대로에서

진종일 어미, 누이와 붙어 있는 일보다

은밀하고도 즐겁게 느껴진다

 

페트병 한 개와 물고 뜯는 시간, 나는

이것을 단순해지기 위한 노력이라 부른다

썩은 고깃덩이로 던져진

이 도시에서 단단한 무기질의 희망

얻기가 그리 쉬운가

누르기만 하면 입발린 언약들

당장이라도 쏟아내는 자판기들아

 

웃을 테면 웃어라

욕창이 번진 몸에 비명까지 지르는 이 물체는

이제 고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심은 더욱 식욕을 부풀리고 나는

이것을 기꺼이 먹기로 작정한다

완강하던 페트병에 드디어 금이 가고

 

텅 빈 속살 들여다본 순간, 나는

속았음을 직감한다

 

어둠속을 휘적휘적 걸어갈 때

! 저기 또 푸른 슬리퍼 한짝이……

내 야성의 턱뼈를 긴장시키고 있었다

 

                   (1998년 매일신춘문예 당선작품)

 

 

1998년 매일신춘문예,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셨습니다. 등단 무렵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1998년 매일신춘문예로 등단할 무렵 저는 조그만 스튜디오엘 다니고 있었지요. 그곳은 녹음을 하거나 빈티지 오디오 같을 걸 취급하는 곳이었는데 하루 종일 음악을 듣고 멍 때릴 수 있는 곳이었어요. 지금도 생각하면 그 시기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그 일을 하면서 저는 많은 습작과 독서를 할 수 있었죠. 그 사무실 아래 공터에서 아침부터 페트병을 뜯던 개를 발견하고 써내려간 시가 바로 ‘공터에서 찾다’입니다. 개하고 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는 것 같아요. 2000년 수주문학상 수상작 ‘여기가 도솔천인가’에도 개가 나오고 그 뒤 2003년 경향신문 당선작 ‘귀로 듣는 눈’에도 또 개가 나오는 것을 보면요.(웃음) 경향 신문사에서 당선 전화를 받았을 때 전 둘 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요. 12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날, 그 소식을 받아 정말 기뻐했던 게 지금도 기억에 남네요. 남편 또한 그 해 동아일보에 시조가 당선 되어 안팎으로 경사가 겹쳐 축하의 전화를 연거푸 받았던 것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목련보신탕

 

 

왜 하필 목련보신탕인가

지도에는 없는 목련이라는 지명이 있다던가

목련이 한창일 때 그 보신탕집이 들어섰다던가

그맘때 도살된 개들 눈에는 하얗게 목련이 질려 있어

고깃살이 꽃잎처럼 부드럽다던가

그 집 평상에선 좋든 싫든 목련을 바라보며 음식을 들게 된다던가

그때 꼭 한둘은 목련에 얽힌 추억담을 이야기하게 된다던가

급기야 뼈다귀 쌓이는 것도 꽃잎으로 보이면

 

당신은 빼도 박도 못하는 목련교도가 된다던가

그 흔한 네온 빛 하나 담지 못한

하얀 바탕 검은 글씨의

 

목련보신탕

꽃 이름 후광을 입어

매캐한 누린내가 없어지는 그 이름

목련보신탕

 

         (시집『입술을 건너간 이름) 

 

      

• 앞에서도 언급하셨듯이, 우연한 발견으로 개에 관한 시가 많으신지요? 아니면 유독 개에 천착하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 한 번도 개를 의식하여 써본 적은 없어요. 단지 그 날 개가 눈에 들어왔을 뿐이거나 시 쓸 때 유용한 소재였을 뿐이죠. 가끔씩 사람과 개가 다정하게 걸어가는 걸 보면 뒤돌아서 보거나 할 때가 있긴 해요. 저 개는 자기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하면서요. 각기 다른 종족이 이렇게 한 세계에서 감정을 교류하며 살아가는 게 따스하기도 하고 그게 또 슬퍼지기도 해요. 또 어떤 날은 사람에게 착 밀착하여 살아가는 그것들이 오히려 홀로 쓸쓸하게 살아가는 인간들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보여 비위가 상할 때도 있어요. 뭐 그런 것들을 자꾸 생각하다 보니 시로 연결되는 것 같아요.

 

 

, 혹은 물품

 

 

거제 포로 수용 기념관

철장 안 포로들 사진 뒤에

새겨진 붉은 경고판

 

‘철창 너머로 말 혹은 물품을 교환치 말 것’

 

몇 가마니 말도

한순간 매장당하는 작금과 달리

말과 물품이 동일시되던 시절이 있었지

 

이쪽의 말 한 마디에

저쪽의 저울 눈금이 흔들리던

말의 물물교환 시절,

 

눈 밝은 보초병을 피해

말은 생필품처럼 은밀히 거래되었지

 

어떤 말은 밤의 절창에 옆구리가 찔려

 

붉은 피가 번지기도 했지

 

밤의 협곡을 내달리던 말들 중에는

젊은 너어스들 사이에서

거즈를 갰다는 시인의 뼈저린 고백도 있었지

 

어떤 말은 불가사의한 춤 같았지

칼집 속에 숨어 있다가

단 한 번만 뽑을 수 있는

 

                (2020. 시집『내가 모르는 한 사람』)

 

 

• 죄수가 어떤 이유인가로 독방에 옮겨지게 되었을 때, 죄수는 절규합니다. “제발, 독방만은 안돼!” 라고요. 그런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느닷없이 독방에 갇히게 된 어르신들의 심정이 저러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인간은 말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습니다. 누구하고도 말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죽음뿐일까요? 그래서 고독사가 생겨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할 수 없을 때, 저희 어머니의 말씀을 빌리자면 하루 종일 입 한 번 뗄 수 없을 때의 삶이란, 살아서 지옥을 경험하는 것처럼 견디기 어렵고 또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말의 물물교환은 밥보다 소중한, 또 하나의 생명줄일 것입니다. 시인은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말을 겁니다. 모든 시인들이 바라는 것은 시인의 말이 독자들에게 “생필품처럼” 소중하게 가 닿기를 바라는 것일 겁니다. 시인님께서는 이런 소중한 경험을 하신 적이 있는지요?

 

• 코로나와 이 시를 잘 연결시키는 질문 같아요. 이 시는 제가 가족여행으로 간 거제포로수용기념관에서 소재를 발견해서 쓴 시입니다. 그 때 본 사진 한 장이 대단히 인상적이었어요. 포로들 뒤에 팻말이 한 개 붙어 있었는데 그 문구가 이랬어요. 철창 너머로 말 혹은 물품을 교환치 말 것” 말을 물품과 함께 교환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았다는 게 너무 충격이었죠.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무게를 가진 그 시절의 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죠. 지금은 그 때와 달리 몇 톤의 말이 아무렇게나 버려지고 생산되는 시대 같아요. 그 속을 살아가는 시인의 말도 거제포로수용기념관에서 봤던 문구처럼 절실한 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철창 사이로 아주 긴한 것을 나누듯 시 한 구절 한 구절을 위험을 무릅쓰고 내놓아야 하는 게 시인이 아닐까 하구요.

 

 

 

여기가 도솔천인가

 

 

칠성시장 한켠

 

죽은 개들의 나라로 들어선다

누렁개 흰개 할 것 없이 검게 그슬린 채

순대처럼 중첩되어 누워 있는 곳

 

다 부질없어라,

살아서 쏘다니던 거리와

이빨을 드러내던 증오

쓰레기통 뒤지던 욕망들이

결국은 이 몇근의 살을 위해 바쳐진 것이라니,

 

뒹구는 눈알들을 바라본다

뿔뿔이 흩어져 잘려나가는 팔다리와

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

날렵하게 춤추는 저 검은 칼을,

 

이제는 검은 길을 헤매다니는 일이 없을 거야

발길에 차여 절뚝거리는 일도

마음에도 없는 꼬리 흔드는 일은 더더욱……,

 

좌판들 위에서

꾸덕꾸덕해진 입술들이 웃는다

이제는 물고 뜯는 일 없이 한통속이 된

검은 개들의 나라에서

 

살아서 오히려 근심 많은 내가

거추장스런 팔다리 휘적이며 걸어간다

 

             (1회 수주 문학상 수상작품)

 

 

• 김선우 시인의 시구(“인간이란 것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에 오랫동안 붙들려 있습니다. 제게 시 읽기와 시 쓰기는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한 방법론적인 선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선택이라기보다는 살아가기 위한, 살아내기 위한, 그 모든 것, 마지막 보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님께서는 왜 시를 쓰시나요?

 

• 저는 시 쓰기가 재미있어요. 다른 일을 할 때는 쉬 지치고 조금 오랜 기간 하면 시들해지는데 이 시 쓰기는 힘든 만큼 그것을 넘어서는 재미가 또 대단해요. 재미가 없으면 아무도 시키지 않는 일을 왜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면서도 붙잡고 있겠어요? 그렇다고 항상 신나고 재미있는 건 아니에요. 그럴 때면 길게는 달포쯤 몸과 맘을 다른 일에 집중하기도 하죠. 그러다보면 다시 시를 써야겠단 생각을 하고 언제나처럼 다시 시를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죠. 제가 좀 고지식해서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하는 편이에요. 저는 이 일 이외 다른 일에는 별 매력을 못 느끼는 것 같아요. 사람들하고 910일 여행을 하기도 하고 가끔씩 시와는 관계가 먼 어떤 걸 배우기도 하지만 언제나 책상 앞에 돌아와서 이러고 있는 걸 보면요.

 

 

 

 

초당(草堂)두부가 오는 밤

 

 

옛날에는 생각도 못한 초당을 알아

서늘한 초당두부를 알아

동짓날 밤

선연한 선지를 썰 듯 썩둑썩둑 그것을 썰면

어느새 등 뒤로는

그 옛날 초당(草堂) 선생이 난을 칠 때면

뒷목을 서늘케 하며 일어서던 대숲이 서고

대숲을 흉흉히 돌아나가던 된바람이 서고

그럴 때면 나는 초당 선생이 밀지(密旨)를 들려 보낸

이제 갓 생리 시작한 삼베속곳 일자무식의 여복()이 된다

 

때마침 개기월식하는 하늘 분위기로

가슴에 꼬깃꼬깃 품은 종잇장과

비린 열여섯 해를 바꿀 수도 있을 것 같고

저잣거리의 육두문자도 오늘 밤만큼은 들리지 않는다 하고

밤 종일 붙어 다니는 개새끼들에게도 한눈팔지 않고

다만 초당 선생 정지 간에서 저고리 가슴께가 노랗게 번진 유모가

밤마다 쑹덩쑹덩 썰어 먹던 그것 한 점만 우물거려봤으면

이 심부름 끝나면 내 그것 한 판만 얻어

뱃구레 홀쭉한 동생들과 실컷 먹으리라던

허리춤에 하늬바람 품은 듯 훨훨 재를 넘던 그 여복이

초당 선생 묵은 뒤란으로 죽어 돌아온 밤

 

그 앞에 서면 그 여복 생각에 선생도 목이 메였다는 그것을 나는

슬리퍼 찍찍 끌고 동네 마트에서 너무도 쉽게 공수 받아

이빨 빠진 할멈처럼 호물 호물 이리도 쉽게 먹는다는 생각에

그것이 오는 밤은

 

개짐**에 사타구니 쓸리는 줄 모르고 바삐 재를 넘던 그 여복처럼

목숨을 내놓지는 못할지언정

슴슴하고 먹먹한 시 한편은 내놓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우라질 초당두부가 오는 밤이다

 

 

             

*허엽(許瞱)1517-1580,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초당(草堂)이며 허균, 허난설헌의 아버지, 청백리이며 문장가, 조광조 윤근수 구수담 허자 등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파직 당함, 허엽은 강릉의 바닷물로 간을 한 두부를 만들게 했는데 그의 호를 따서 초당두부라고 하였다.

                                 

**삼베를 기저귀처럼 잘라서 사용하던 옛날의 여성 생리대         

 

                (6회 시산맥 수상작품)

 

 

• 시인님의 시에는 유독 밥을 소재로 한 시가 많습니다. 시인님에게 밥은 어떤 의미일까요?

 

• 밥은 제가 쓰려고 작정하고 썼던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요. 쓰다 보면 또 밥 이야기를 제가 하고 있기도 했고 밥 이야기가 또 시집에 몇 편씩 실려 있곤 했어요. 이번 시집에도 밥 이야기가 이렇게 많이 들어 있는 줄 저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요. 밥은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에게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죠. 그것은 나를 살게 하는 동시에 그것을 얻기 위해 모멸감을 견디며 살게 하죠. 그런 밥의 이중적인 면에 관심이 뺏기다보니 자꾸만 그것에 관해 쓰게 되나 봐요.

 

 

• 시인님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며, 최근 시인님을 골몰케 하는 화두는 무엇일까요?  

 

• 누구나 공평하게 제대로 대우를 받는 세상이지요.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를 위해 배려하고 나눠 줄줄 아는 세상, 학연, 지연에 끌려 다니지 않는 분명하고 명확한 세상, 믿고 따를 수 있는 참스승이 있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이 온다면 시인의 수가 지금보다는 많이 줄겠지요(웃음)

제가 요즘 자주 하는 생각은 다음 시집에 관해서입니다.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색채를 보여드리고 싶기 때문이지요. 단정함보다는 좀 거칠더라도 밀고 나가는 힘이 있는 시를 써보고 싶네요.

 

 

• 시 말고 시인님을 붙들고 있는 믿음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 저는 사람에 대해 상당히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지하철을 타면 옆 사람이 궁금하고 앞 사람도 궁금하고 또 그 사람들이 지금 가고 있는 집이나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도 궁금합니다. 또 시장을 가면 좌판위에서 곤충처럼 쪼그라들고 있는 할머니들이나 그 앞을 서성거리는 손님들도 궁금하고 또 그들의 뒷모습도 궁금합니다. 저는 어릴 때 아버지와 어딜 가면 아버지 턱 밑에서 무엇을 꼬치꼬치 그렇게나 물었다고 해요. 그래서 집에 오면 엄마더러 ‘성해랑 어딜 가면 뭘 그리 묻는지 귀찮아 죽겠다’고 하셨대요. 제게 믿음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요? 어디든 내가 궁금해 할 대상이 널려 있는 이 세계가 너무 너무 맘에 든다는 거요

 

 

 

난초도둑

 

 

 

도둑이 되려면 난초도둑쯤은 돼야지

돈다발과 패물을 자루 속에 쓸어 담기보단

하나에 몇 억 한다는 난초분 하나는

업고 나와야 일등 도둑이지

 

천하의 도둑은 장물의 맘을 살펴야 하는 법

그 가는 옆구리들의 떨림에 집중해야 난초도둑이지

, 뒤꿈치를 들고

 

허공에 한 획을 긋는 난초들처럼

나도 세상에 나서 큰 도둑이나 한번 돼 보아야지

 

밖에서 트럭은 부릉부릉 빨리 서두르라지만

나는 개의치 않을 거야

귀를 찢는 보안벨이 울려도

나는 천천히 걸어 나올 거야

 

나 같은 것 백 명은 팔아도 못 살 그것을

내 천한 심장 가까이 기대인 채로

 

난 민들레씨앗 내려앉는 언덕에다 그것을 심어 줄 테야

더덕처럼 억센 뿌리를 내리게 둘 거야

몇 억을 눈 녹듯 사라지게 할 거야

 

왕후의 자리에서 어염의 촌부로 만들어 줄 거야

다시는 뽑아 가지 못하게 하늘을 끌어당겨 가려 줄 테야

 

             (2020. 시집『내가 모르는 한 사람』)

       

           

• 시「난초도둑」은 제가 특별히 사랑하는 시입니다. 난초도둑이야 말로 시인이며, 이 시에 나타난 난초도둑의 자세가 진정한 시인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시인은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고 시인으로 타고난 사람이며, 신의 말을 받아 적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시를 공부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시를 배운다고 다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등단하고서 금세 사라지는 시인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시를 공부하는 예비 작가들에게 시인님께서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 오래 쓰는 사람이 되셨으면 해요. 한 번에 반짝하기 보다는 묵은 장처럼 오래 오래 쓸 수 있는 시인 말이죠. 쓰디쓴 어둠과 외로움, 방황의 시간도 겪고 난 뒤 쿰쿰한 냄새를 피우는 발효가 잘 된 시인들이 되셨으면 해요. 그러려면 아무래도 시류나 경향, 문단의 말단에 기웃거리지 말고 조금은 외롭더라도 우직하게 자기 길을 믿고 가셨으면 해요. 반짝 하고 사라지는 시인들은 너무나 많아요. 그리고 아직은 반짝거리고 있지만 언제든 사라질 시인도 많구요. 그보다는 심장 속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자기만의 방이 있어 언제나 뜨거운 피를 생산해낼 수 있는 저력 있는 시인들이 되셨으면 해요.

 

 

 

•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책이나 작가가 있다면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시가 있다면 어떤 시인지 궁금합니다.

 

• 저는 이상하게 영향을 받은 책이나 작가를 묻는 질문에는 참 난감해져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책은 거의 읽다가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나마 기억에 남는 책들은 거의가 어릴 때나 청소년기에 읽었던 책들이죠. 제일 기억에 남는 책은 중학교 때 읽었던 르블랑의 ‘괴도 루팡’ 시리즈에요. 그 후에는 일본 소설들을 많이 읽었는데 ‘다자이 오사무’나 ‘마루야마 겐지’ ‘나쓰마 소세키’ 같은 작가들의 소설을 읽었지요. 저는 겉은 재미있지만 속은 슬픈 시를 좋아합니다. 돌아가신 신현정 시인의 ‘자전거 도둑’이나 ‘오리 한 줄’ 같은 시 말이죠.

 

 

자전거 도둑 / 신현정

 

                                                           

봄밤이 무르익다

누군가의 자전거가 세워져 있다

자전거를 슬쩍 타보고 싶은 거다

복사꽃과 달빛을 누비며 달리고 싶은 거다

자전거에 냉큼 올라가서는 핸들을 모으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은빛 폐달을 신나게 밟아보는 거다

꽃나무를 사이사이 빠지며

달 모퉁이에서 핸들을 냅다 꺾기도 하면서

그리고 불현듯 급정거도 해보는 거다

공회전하다

자전거에 올라탄 채 공회전하다

뒷바퀴에 복사꽃 하르르 날리며

달빛 자르르 깔려들며

자르르 하르르.

 

     (신현정 시집『자전거 도둑』)

 

 

11첫 동시집『오분만』을 출간하셨습니다. 동시는 언제부터 쓰셨으며, 동시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이 동시집에서 시인님이 아이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가장 아끼는 동시 한 편 소개 부탁드립니다.

 

 

• 동시는 2014년부터 쓰기 시작했지요. 무작정 그냥 한번 써본 게 이리 몇 년을 계속 쓰게 되었네요. 그동안 발표한 동시들도 꽤 있는데 이번 동시집에는 그것들이 들어가지 못해서 조금 아쉽네요. 이제 두 번 째 세 번 째 동시집에서 선보이겠지요. 이번 동시집은 우수출판콘텐츠 사업에 선정되어서 거의 신작인 동시들을 묶게 되었지요. 동시의 매력은 시와 달리 한번 느낌이 오면 앉은 자리에서 몇 편씩을 쓸 수 있다는 거죠. 그 영향으로 한동안 동시가 떠올라 시는 또 못쓰게 되는 불운한 일도 있지만요. 제가 아끼는 저의 동시는 ‘잠자리 나라의 이상한 자랑’입니다.

 

 

잠자리 나라의 이상한 자랑

 

 

언니들이나 잡는 줄 알았던 잠자리를

처음으로 잡았다 놓아준 날

 

내가 놓아준 그 잠자리도

태어나 처음 사람에게 잡힌 건 아니었을까

 

내가 하루 종일 동네를 으쓱거리며 다는 것처럼

그 잠자리도 죽을 뻔한 모험담을

친구들에게 떠벌리고 다녔을 거야

 

그건 오싹하고도 신나는 자랑거리일 테니까

조용하고 심심한 잠자리의 나라에선

 

          <동시마중>(2018.3,4월호)

 

 

• 시인님의 앞으로의 계획과 확장하고 싶은 시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요?

 

• 저는 조금 시기를 앞당겨 시집을 내고 싶어요. 시가 많을 때는 한 해에 두 권의 시집을 내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요. 그리고 또 시가 안 나올 때면 몇 년을 쉬기도 하면서요. 시집이 나오는 시기에서 조금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그리고 좀 더 재미있는 시를 쓰고 싶어요. 고민하면서 읽지 않고 한편의 재미난 소설을 읽듯이 읽혀지는 시 말이죠. 그것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이 팍팍한 현실을 잊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 같아요.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나 시인님의 시에 대해서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다 면 들려주실까요?

 

 

• 세상이 얼마나 재미가 없으면 시 쓰는 일을 재미있다고 할까요? 시인들이란 저 우주의 어느 엉뚱한 별에서 뚝 떨어진 존재들이 아닐까요? 그들의 쓰잘 데기 없고 기이한 이야기를 귀담아 읽어주시는 독자님들이 계시기에 시인들은 그나마 이 지구에서 잘 살아가고 있는 거겠죠. 제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제가 쓰는 시 속에서 제가 쉴 수 있었으면 하는 거에요. 조금씩 그렇게 되겠지만요.

 

감사합니다.

 

 

산수유국에 들다

 

 

그곳 서방정토의 삼월에는

꽃 이름을 앞 세운 국가들이 나뭇가지마다 열린다네

단 하나의 시조설화도 없이

산수유국 목련국 진달래국 매화국이

가난한 가지마다 봉긋봉긋 솟아오른다네

향기가 없으면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는 나라

향기로운 코 하나로 누구나 백성이 되는 나라

스스로 치장하고 목청 높여 백성들을 부르는 나라

하늘 아래 이보다 더 아름답고 곡진한 국가는 없을 터

 

그곳 서방정토의 삼월에는

백성을 호객하며 핵폭발로 태어나는 국가들이 있다네

거창한 국민헌장도 영토도 없는 나라

일체의 세금도 의무도 지우지 않는 나라

알 수 없는 곳에서 아기가 오듯 흥성스러운 날에

코에 담뿍 꽃분을 묻힌 백성들의 붕붕거리리는 한때*가 지나면

알 수 없는 곳으로 늙은이가 져내리듯

캄캄하게 져버리는 나라들이 있다네

그건 한순간의 일이라서

단 한명의 열혈 백성도 따라갈 수 없다네

 

* 장석주의 시 「붕붕거리는 한때」에서 인용함.

 

               (시집『입술을 건너간 이름) 

 

 

 

 오랜 인터뷰로 우리는 몇 잔인가의 커피를 더 마셨다. 시인도 나도 다시 각자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야 할 터였다. 나는 시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영민하면서도 소탈한 향에 취해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런 나의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시인이 말했다. “함께 걸을래요?” 노랗고 빨간 눈 내린 호수공원을 걸으며 생각했다. 삶이란 이렇게 무작정 걷는 것이며 까마득하니 앞이 보이지 않을 때일수록 더욱 더 가열차게 걷는 것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대로 “닥치고 걷는” 것이라는... 걷다 보면 이렇게 좋은 시인을 만나 벤치에 앉아 잠시 쉬어가기도 하고, 호수에 투영된 늦가을 나무 그림자에서 나를 발견하기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시인도 나도 또 “닥치고” 무작정 걸어야 한다. 시인의 걸음걸음마다 가족의 평안과 사랑과 축복과 크나큰 시적 성취가 함께하기를 나는 빌었다. 아울러 시인이 살뜰히 지어낸 훈내나는 따뜻한 밥이 시인의 시를 사랑하는 독자들을 배불리 먹이고, 그 고봉밥을 배불리 먹은 독자들이 또 밥을 지어 다른 독자들을 배불리 먹이고, 먹이고, 먹이고,

 

 

 시인 만만세! 문성해 시인, 만만세다!

 

 

처서

 

 

나는 오늘

가을볕 속으로 빨래가 물기를 털어 내는 걸 바라보면서

그러고도 내 습진을 내다 말릴 수 있게 넉넉함이 남아도는 이 볕이 좋고

헛헛한 위장 속으로 수제비를 같이 흘려 넣을 가난한 식구가 있어 좋고

 

볕이 처마를 오지게 지지는 오후가 되어서는

늙은 염소처럼 우물거릴 수 있는 햇고구마가 있어 좋고

오늘은 큰 놈에게 안경 해 줄 돈이 품에 넉넉히 있으니 더욱 좋고

 

그러고도 더 줗은 건

일생에서 가장 높고 맑은 날 중의 하나인 오늘이

아직 이마 위에 두둑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신사임당을 연상시키는 시인의 안빈낙도(安貧), 좋다! 더욱 좋고, 더 좋다! 

 

 

《문성해 시인》

1998년 매일신춘문예,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는 <자라> <아주 친근한 소용돌이> <입술을 건너간 이름>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내가 모르는 한 사람> 이 있다.

대구시협상, 수주문학상 , 김달진 문학상 부문 젊은시인상, 시산맥 작품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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