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성의 혈통으로 붉게 술렁이는” 시인, 박완호 시인과의 인터뷰

홍수연기자 | 기사입력 2020/10/29 [11:50]

“식물성의 혈통으로 붉게 술렁이는” 시인, 박완호 시인과의 인터뷰

홍수연기자 | 기사입력시간 : 2020/10/29 [11:50] | 조회수 : 224

 

  © 한국예술문화타임즈



식물성의 혈통으로 붉게 술렁이는” 시인, 박완호 시인과의 인터뷰

 

 

식물성의 혈통으로 붉게 술렁이는 생즙, 마시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벼락 맞은 나무처럼 창백해지는 유리잔, 피톨처럼 묻은 알갱이들, 엄마, 라고 하면 상투적인 것 같아 다른 발음으로 부르고 싶어지는 // 한 사람을 본다 사랑, 이라고 쓰면 그게 누구야 하는 질문들 비좁은 틈바구니를 가까스로 빠져나온, 토마토와 나의 // 낯빛이 짙붉게 포개지는 순간,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 나는 문득 낯부끄러운 꿈을 꾸다 들켜버린 토마토가 되고 말았다

                                                       

시인의 시 『토마토 베끼기』에서

 

 

          

 몇 해 전 필생의 꿈이었던 시집을 출간하였다. 지인들이 나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어김없이 나의 대답은 “죽기 전 시집 한 권 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다행히 죽기 전에 꿈을 이룬 나는 여러 시인께 시집으로 인사를 드렸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6월 어느 날, 나는 반가운 문자를 받았다. 박완호 시인에게서 온 문자였다. 시집 잘 받았다, 고 고맙게 잘 읽겠다, 는 문자였다. 그때의 기분이란 세상에 막 내동댕이쳐진 갓난쟁이의 걸음마를 축하하고 인정해주는 듯하여 감사하기도 하였고 신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는 시인을 검색해 보았다. 시인이 그 유명한 시, 「목련여인숙」의 시인이며 시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이미지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슬프고 낭만적이어서, 평소 내가 꿈꾸고 있었던 시인의 이미지 그대로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오늘, 억새꽃 만발한 가을날, 나는 베이지색 바바리코트 깃을 한껏 추켜세우고 나의 첫걸음마를 처음으로 격려해 주었던 그리하여 많은 위로를 받았던 시인, 부드러운 컬이 들어간 긴 머리가 잘 어울리는 시인, “목마와 숙녀”의 박인환을 연상시키는, 테리우스처럼 잘 생긴  시인(시인은 현재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을 만나러 카페로 들어섰다.

 

 

《대표시 모음》

 

 

토마토 베끼기  

 

 

토마토의 불안을 본다, 는 문장을 쓰고 있을 때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침표를 찍기 전이었다 마침표를 찍을까 말까를 고민하던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토마토는,

 

치명적으로 붉은 생각을 품은, 손바닥으로 살짝 감싸기에 알맞은 크기의, 한번 손에 쥐고 나면 놓치고 싶지 않은, 말랑말랑하고도 질긴 근육질의, 처음인지 마지막인지 자꾸 되묻는 연애처럼 비릿해지는

 

식물성의 혈통으로 붉게 술렁이는 생즙, 마시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벼락 맞은 나무처럼 창백해지는 유리잔, 피톨처럼 묻은 알갱이들, 엄마, 라고 하면 상투적인 것 같아 다른 발음으로 부르고 싶어지는

 

한 사람을 본다 사랑, 이라고 쓰면 그게 누구야 하는 질문들 비좁은 틈바구니를 가까스로 빠져나온, 토마토와 나의

 

낯빛이 짙붉게 포개지는 순간,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 나는 문득 낯부끄러운 꿈을 꾸다 들켜버린 토마토가 되고 말았다

 

 (202011월 출간 시집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

 

양계장

 

 

서가에 아무렇게나 꽂힌 책들처럼

닭들이 양계장 바닥에 늘어져 있다

가다가 서고 섰다가 가고

졸다 걷다 푸드덕 날개를

한껏 흔들어대기도 하며

얼마 안 남은 생의 한때를

퇴화한 감각으로나마

결사적으로 확인해보는 것이다

어두워지지 않는 세상에서의

삶이란 얼마나 환한 절망인가?

환하게 죽어가는 닭들,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닭대가리들이

오늘을 제쳐두고 오로지

다가오지 않을 내일만을 떠벌리는

거짓 선지자의 기도문처럼

반복적으로 땅바닥에

굵어질 틈 없는 다리를 세워놓는다

한 번도 읽지 않고 낡아버린

책 속의 슬픈 이야기처럼

닭들이 환한 불빛 아래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조금도 낯설지 않은

어떤 지상에서의 반나절

 

 (202011월 출간 시집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

 

 

목련여인숙

 

 

  환한 봄밤이었다 막차를 놓치고 찾아든 여인숙, 판자대기꽃무늬벽지로 엉성하게 나뉜 옆방과

 

  천장에 난 조그만 구멍으로 반반씩 나눠가진 형광등 불빛이 이쪽저쪽을 오락가락할 때, 나는

 

 

  김수영을 읽거나 만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했던 백석을 꿈꾸며 되지도 않는 시를 끄적거리다가

 

  갑자기 불이 꺼지고 시팔, 속으로 투덜대며 원고지를 접고는 이내 곯아떨어졌을 텐데, 잠결에 들려온

 

  옆방 여자가 내는 소리가 달밤의 목련꽃처럼 피어나는 걸 숨죽여 듣다가 그만 붉게 달아오른 꽃잎 하나를 흘리고야 말았지

 

  아침 수돗가에서 마주친 여자는 낯붉히며 세숫대야를 내 쪽으로 슬며시 밀어주는데 나는 괜히

 

  간밤 그녀가 흘려보낸 소리들이 내 방에 와선 탱탱하게 부풀었던 걸 들키기라도 한 듯 덩달아 붉어져서는

 

  내 쪽에 있던 비누를 가만히 그녀 쪽으로 놓아주었다

 

(시집『너무 많은 당신』)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박완호 시인님.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생각했던 모습 그대로 미남이세요.(웃음) 순서를 바꾸어 먼저, 11월 출간될 시집(『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에 대해서 여쭈어보고자 합니다. 이번 시집이 시인님의 일곱 번째 시집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시집에서 시인님께서 독자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요? 그리고 일곱 번째 시집을 출간하시기까지 시인님의 시 세계는 어떻게 변모하여왔을까요?

 

• 네,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번에 나온『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는 등단한 지 삼십 년 만에 내는 일곱 번째 시집입니다. 자신의 시 세계가 변모해 온 궤적을 스스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 품어온 생각의 중심을 지켜 가면서,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깊게 넓게 만들기 위해 애쓰는 중이라는 점만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집을 낼 때마다 특정한 주제를 설정하는 시인들도 있지만, 저 같은 경우는 제가 추구하는 몇 가지 시적 주제를 꾸준히 써오는 가운데 시집에 따라 어떤 부분이 상대적으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지의 차이가 있다고 해야 하겠지요. 가족사적 아픔을 다룬 시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드는 대신, 삶과 시인으로서의 자아 성찰을 다룬 시들이 늘어간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는 변화이겠군요.

 

 

 

 

 

배교자

 

 

아버지는 엄마의 하나뿐인 종교였다.

삐딱하게 기운 살림을 건드리고 가는

이교도들의 거친 발길이야 참을 만했지만, 누구든

아버지를 불경스럽게 입에 올리기라도 하면

종교전쟁도 불사할 태세였던 엄마.

단단한 믿음이 꽃을 피우기도 전

느닷없이 신전을 떠나버린

나의 마리아.

하나뿐인 신도를 잃은 아버지는

세상 절벽 아래를 서성거리다

작은 돌멩이에 걸리기라도 하면

아무 데서나 고꾸라지곤 했다.

나나 누이들은 아무래도

아버지의 신도는 되지 못했지만

한낮에도 해가 뜨지 않는

하루하루를 끼니처럼 이어가며

엄마의 부활처럼

빛나는 죽음을

간절히 꿈꾸던 날도 있었다.

아버지가 엄마의 종교였던

날들은 오래 전에 지나갔지만

어떤 사랑은 가끔

종교보다 강한 무언가가 되기도 한다.

엄마는 죽어서도 살아

나의 신앙이 되었지만,

아버지는 죽고 나서야

엄마의 신도가 되었다.

 

(웹진 시인광장 선정 2018년 올해의 좋은 시 500)

 

 

 

• 위의 시 배교자」에서 시인님은 어머니를 “단단한 믿음이 꽃을 피우기도 전 / 느닷없이 신전을 떠나버린 / 나의 마리아.라고 하십니다. 시인들은 다들 왜 이리 슬프고 아픈지요. 저도 어머니를 잃고서야 임영웅의 “배신자” 노래에 사무치게 흐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왜 모든 것들은 지나고서야 그 어두운 장막을 벗고 또렷해지는지요? 정말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저 또한 어머니는 어머니라서,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엄마”  “부활” 하셔서 다시 제 앞에 나타나 주신다면……,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애타는 그리움의 대상이자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의 대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의 정황상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난 뒤의 시인님의 생활 또한 많이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부터 시를 쓰셨으며 시를 쓰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 열다섯 무렵, 갑자기 들이닥친 모성의 상실로 인해 제가 서 있던 세상의 바탕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지요. 영화 ‘피에타’의 마지막 장면처럼 세상을 떠난 엄마의 죽음은 지나치게 예민한 사춘기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사건이었어요. 마흔셋 젊은 나이에 아내를 잃은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었겠지만요. , 담배는 물론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며 온갖 방황을 했지만, 생전의 엄마가 내게 걸었던 기대를 아주 외면할 수는 없었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바깥으로 떠도는 대신 안쪽을 파고드는 자신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 운명처럼 시를 만났고, 종교를 통해서도 겪지 못한 구원을 시를 통해 이루게 되더라고요. 시를 통해 엄마를 만나게 되고 시인이라는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었으니까요. 고교 시절 문예부에서 이승희 시인 같은 좋은 친구를 만나 함께 시를 쓰며 평생의 지기로 살아가는 중이기도 하고요.

 

 

• 올해 7월 교통사고로 우리 곁을 떠난 김희준 시인은 시를 쓰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시인님보다 까마득한 후배의 말이지만 제게는 소중하여 이곳에 인용하는 무례를 양해 바랍니다.)

 

김희준 시인 ;

(저는 어릴 때부터 ‘나에게 있어 시란 뭘까’를 고민하는 시간보다 ‘시가 세상에 왜 있는 걸까’를 더 오래 고민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시는 태어나자마자 쥔 손금 같아서, 시를 쓰는 일이 당연했어요. 시인이 되어야지! 라는 생각이라든가 장래 희망란에 시인을 적어본 일은 없지만 그냥 늘 글을 쓰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시는 뭘까, 시인은 왜 있을까, 시가 세상에 왜 있지’를 고민했던 것 같아요. 언젠가 또 바뀌겠지만 현재 나름의 답을 내려보자면,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추상적으로 혹은 구체적으로 표현해내기 위한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세밀하고 다양한 울음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 이해받기 어려운 감정의 영역을 모두에게 설득해주기 위해서 시가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제가 시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내가 나를 잘 알아주고 싶어서, 또 당신을 잘 보고 싶으니까요.)

 

 저 또한 제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 시를 썼었던 것 같아요. 오랜 탐구의 결과는 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씁쓸한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지만요.(웃음) 진부한 질문이지만, 시인님께 시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시인은 왜 있을까요? 시가 세상에 왜 있는 걸까요?

 

• 김희준 시인은 저에게도 특별한 친구입니다. 놀라운 재능을 지닌 시인인데, 그렇게 서둘러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김희준 시인은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시는 윤동주나 기형도처럼 모두의 가슴 깊이 새겨질 거라고 믿고 싶어요.

 저에게 있어 시는,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 나를 둘러싼 세계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나’를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하나뿐인 길이기도 하고요. 말씀하신 대로 시인은 시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그런 존재이지요. 시인은 시를 통해 ‘나’를 실현하는 존재이지만, 누군가는 시를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닫고 아픔을 위로받는 경험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동력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또한 시가 존재해야 하는 수많은 까닭 가운데 하나이겠지요. 계속해서 시를 써 갈수록 자기가 쓰는 언어를 더 가치 있게 만드는 시인 본연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네요.

 

 

 

• 시인님의 시를 읽다 보면 시인님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염결성을 추구하시는 분 같습니다. 저는 멀리 하와이에 있는 데이지 김 시인에게서 제가 살아오면서 사람들에게 받았던 상처를 보상받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신뢰와 존중인데요. 시인님과 몇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시인님께도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 제가 한결 따뜻하고 포근한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며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이야말로 올바른 시인의 자세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11월 출간될 시집(『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에 실린 대표시 「토마토 베끼기」를 살펴보면 “낯빛이 짙붉게 포개지는 순간,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 / 나는 문득 낯부끄러운 꿈을 꾸다 들켜버린 토마토가 되고 말았다”라고 토로하십니다. 이런 염결성이 혹여 광폭한 세상을 살아내기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 이런 염결성이야말로 서정시가 추구하는 지점일까요?  

• 제가 겉보기와 달리 주변머리가 부족한 편이라, 많은 사람을 만나거나 내키지 않는 상황에 뒤섞이는 것을 상당히 꺼리는 편입니다. 특히 시에 있어서는 그 정도가 더 심해서, 저 나름대로 정한 선을 넘어서는 경우 그게 무엇이든 냉정하게 문을 닫아 버리기도 하고요. 시인은 시류에 휩쓸리기보다는 오히려 시류를 거슬러야 하는 존재이겠지요. 그래서 세계의 광폭함에 늘 상처받고 툭하면 주저앉을 수밖에 없지만, 불순한 세계에 물들지 않고 본래의 순수함을 지켜내며 어느 지점에 이르러 가치 있는 결실을 이루어내는 그런 존재. 어쩌면 그 지점에 서정시가 추구하는 가치가 깃들어 있지는 않을까요? 염결성과 더불어 세계와 언어 앞에서의 겸허함 또한 시인이 지녀야 하는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는

 

                                       

송사리가 뛰어올랐다 내려앉은

수면이 파르르 떨린다, 소심한

물낯을 흔드는 것은 물고기를 놓친

허공의 자책, 처음 온 곳으로 햇빛을 되돌려 보내는

비늘의 매끄러운 살결에 정신을 놓아버린

바람의 한숨, 조그만 동심원을 그리며

가라앉는 작은 물고기가 사실은

허공의 전부이고 바람의 온몸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 고요하던 수면을 송두리째 흔드는 것은

너와 나, 너의 순간이 나의 순간 위에

지나온 시간의 무게를 얹었기 때문, 잔잔한

 

물의 낯에 한 겹 한 겹 지문을 새기는 일,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기 때문

 

(김춘수시문학상 수상 시집『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다』)

 

 

• 시인님의 시를 읽다 보면 사랑이라는 시어에 이르러 저는 아득해져 봄날의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들판에 서있는 듯 가슴이 몽글몽글해져 옵니다. “한 사람을 본다 사랑, 이라고 쓰면 그게 누구야 하는 질문들”(「토마토 베끼기」), “물의 낯에 한 겹 한 겹 지문을 새기는 일,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기 때문”(「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는」) 시인은 끊임없이 사랑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라는 생각입니다. 우연히 허연 시인님이 자신을 “가엾음주의자”라 칭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도 한때 저 아닌 모든 사람과 사물들이 너무 불쌍하고 가여워서 박스며 폐지, 빈 병 등을 차 트렁크에 싣고 다니다가 비 오는 날 폐지 주우시는 할아버지나 할머니께 직접 전해드린 적도 많이 있답니다. 시인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뻔한 질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연민’은 시인의 내면을 이루는 가장 큰 정서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시인은 ‘가엾음주의자’이겠지요. 나약하고 상처받은 존재에 대한 연민은 제 시의 바탕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졸시 「빙어회를 먹지 못하는 저녁」에서처럼 손에 든 상추쌈 밖으로 튀어나온 작은 물고기의 눈빛을 보고는 평생 빙어회를 먹지 못하게 된 사람이 바로 저이니까요. 시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제게 있어서도 ‘사랑’은 가장 중요한 시의 주제입니다. 제가 노래하는 사랑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감정을 넘어 사랑의 본질을 향합니다. 사랑의 대상 또한 어떤 사람에 머물지 않고, , , 나비, 나무 같은 것에서 작은 돌멩이나 이름 없는 풀에 이르기까지 제가 순간순간 마주치는 모든 존재들을 향합니다. 이성을 대상으로 하는 시에도 특정한 대상을 향한 사랑을 다룬 시도 있지만, 어떤 한 사람보다는 엄마, 첫사랑, 아내 같은 여러 존재를 아우르는 경우가 적지 않고요.

 

 

 

목련여인숙

 

 

  환한 봄밤이었다 막차를 놓치고 찾아든 여인숙, 판자대기꽃무늬벽지로 엉성하게 나뉜 옆방과

 

  천장에 난 조그만 구멍으로 반반씩 나눠 가진 형광등 불빛이 이쪽저쪽을 오락가락할 때, 나는

 

  김수영을 읽거나 만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했던 백석을 꿈꾸며 되지도 않는 시를 끄적거리다가

 

 

  갑자기 불이 꺼지고 시팔, 속으로 투덜대며 원고지를 접고는 이내 곯아떨어졌을 텐데, 잠결에 들려온

 

  옆방 여자가 내는 소리가 달밤의 목련꽃처럼 피어나는 걸 숨죽여 듣다가 그만 붉게 달아오른 꽃잎 하나를 흘리고야 말았지

 

  아침 수돗가에서 마주친 여자는 낯붉히며 세숫대야를 내 쪽으로 슬며시 밀어주는데 나는 괜히

 

  간밤 그녀가 흘려보낸 소리들이 내 방에 와선 탱탱하게 부풀었던 걸 들키기라도 한 듯 덩달아 붉어져서는

 

  내 쪽에 있던 비누를 가만히 그녀 쪽으로 놓아주었다

 

 

• 시인님의 시「목련여인숙」을 한 번 더 소환하였습니다. 제가 공부하는 시 밴드 시 감상 코너에 시인님의 시「목련여인숙」이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한 젊은 시인의 이 시에 대한 느낌은 참 맛있다였습니다. 선배 시인으로서 시를 이렇게 맛깔스럽게 쓰기 위해서는 어떤 훈련이 필요할까요?

 

• 저 스스로는 저를 참 재미없는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편이라. 시를 맛깔스럽게 쓰기 위해서는 첫째, 매력적인 시적 대상을 마주칠 수 있어야 하겠지요. 시의 매력은 시적 수사를 통해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떤 존재가 지닌 매력적 의미가 바탕이 되어야 할 테니까요. 그러기 위해 시인은 늘 주변을 살펴 가며 시가 되는 순간을 내재한 존재들과 정면으로 마주치려 애써야 하겠지요. 그러한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시인은 늘 깨어 있어야만 합니다. 둘째는, 자기가 쓴 시를 끊임없이 읽어가며 시인이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를 효과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노력해야겠지요. 시인의 개성 있는 호흡을 바탕으로, 시적 대상을 가장 매력 있는 모습으로 드러낼 수 있는 최적의 표현을 찾아내야 할 테니까요.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쓰고 또 쓰는 것. 그게 저 자신에게 주는 답입니다.

 

 

 

염소 울음이 세상을 흔든다

 

 

새끼 염소가 죽었다.

 

난 지 사흘만에 나선 첫 산책길

아카시아 향기에 취해 길을 잃었을까

누구의 귀에도 가 닿지 못한

울음 한 조각 물고

 

똥통에 빠져 죽은

염소의 검은 등을 밟고

수의라도 덮어 주려는 듯

구더기들 하얗게 몰려든다.

 

목덜미 털이 벗겨지도록

종일 새끼를 찾던 어미는

모르는 척 허겁지겁 밥그릇을 바닥까지 핥는다.

 

물기 젖은 염소의 눈길 가닿는

사발 속 허공

 

어미 염소의 허기가

세상의 저녁을 흔든다.

 

(시집『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

 

 

「염소 울음이 세상을 흔든다」를 웹진 시인광장에 자선自選 대표시로 발표하셨습니다. 시인님의 많은 시 중에서 특히 이 시를 애정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 이 시는 오래전 처가에 갔을 때 직접 겪은 일을 쓴 것입니다. 곧 스물아홉이 될 아들이 열 살이 안 되었을 때니, 이십 년쯤 전이었겠군요. 그날이 어린이날이었는데, 며칠 전에 낳았다는 새끼염소가 언제부터인가 눈에 띄지 않더라고요. 온 식구가 나서서 한참을 찾아다녀도 보이지 않아 다들 궁금해 하면서도 반쯤은 포기하고 있던 와중에, 제가 볼일을 보러 집 바깥쪽에 있는 변소에 들어가니 그곳 똥통에 어떤 검은 물체가 떠 있고 그 위에 구더기들이 하얗게 몰려 있더라고요. 그게 바로 죽은 새끼염소였던 거지요. 그때 떠오른 시상을 써 내려간 것이 「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라는 시입니다. 앞에서 언급하신 ‘연민’의 정서가 잘 담긴 시로 볼 수 있겠지요. 새끼염소를 잃고 텅 빈 밥그릇 바닥을 핥는 어미 염소에게서 저는 며느리와 큰아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나서 말할 수 없이 아파하면서도 어린 손주들이 제대로 자랄 수 있도록 마지막 순간까지 끝없는 사랑과 헌신을 베푸신 할머니의 모습을 봅니다. 그를 통해 생의 불행과 허무, 어떻게든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의미를 함께 깨달을 수 있었지요. 제 두 번째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한데, 시적 성취에 대한 평가와 상관없이 저도 모르게 마음이 가는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들꽃 여관에 가고 싶다

 

 

 들꽃 여관에 가 묵고 싶다.

 

 언젠가 너와 함께 들른 적 있는, 바람의 입술을 가진 사내와 붉은 꽃의 혀를 지닌 여자가 말 한마디 없이도 서로의 속을 읽어 내던 그 방이 아직 있을지 몰라. 달빛이 문을 두드리는 창가에 앉아 너는 시집의 책장을 넘기리. 三月의 은행잎 같은 손으로 내 中心을 만지리. 그 곁에서 나는 너의 숨결 위에 달콤하게 바람의 음표를 얹으리. 거기서 두 영혼의 안팎을 넘나드는 언어의 향연을 펼치리. 네가 넘기는 책갈피 사이에서 작고 하얀 나비들이 날아오르면 그들의 날개에 시를 새겨 하늘로 날려 보내리. 아침에 눈 뜨면 그대 보이지 않아도 결코 서럽지 않으리.

 

 소멸의 하루를 위하여, 천천히 신발의 끈을 매고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던 나의 전부를 남겨 두고 떠나온 그 방. 나 오늘 들꽃 여관에 가 다시 그 방에 들고 싶다.

 

                      (시집『아내의 문신』) 

 

 

 

연두의 저녁

                 

 

연두의 말이 들리는 저녁이다 간밤 비 맞은 연두의 이마가 초록에 들어가기 직전이다 한 연두가 연두를 낳는, 한 연두가 또 한 연두를 부르는 시간이다 너를 떠올리면 널 닮은 연두가 살랑대는, 널 부르면 네 목소리 닮은 연두가 술렁이는, 달아오른 햇살들을 피해 다니는 동안 너를 떠올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지점에 닿을 때까지 네 이름을 불렀다 지금은, 나를 부르는 네 목소리가 들려올 무렵이다

 

                              (시집『기억을 만난 적 있나요?) 

 

 

• 시인님의 시들은 모두 아름답지만, 연두의 저녁」은 특히 아름다운 시라는 생각입니다. “연두의 말이 들리는 저녁이다”, “한 연두가 연두를 낳는, 한 연두가 또 한 연두를 부르는 시간이다” 세상이 이렇게 연두 연두 하여 서로가 서로를 사랑으로 호명하는 “무렵”이면 좋겠습니다. 시인님께선 시를 쓰실 때, 무언가에 홀린 듯 한달음에 쓰시는 편이신지요? 아니면 오래오래 퇴고하시는 편이신지요?

 

 

• 글쎄요. 「연두의 저녁」은 어느 해 이른 봄날 저녁, 어딘가를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을 때 길가 가로수 잎 사이로 스미는 저녁 햇살에 비치는 연둣빛 이파리들을 보며 한순간에 떠오른 시상을 그 자리에서 써 내려간 시입니다. 한두 글자를 다듬은 것 말고는 굳이 손댈 구석이 없었지요. 꽤 긴 시 중에서도, 몇 해 전 백두산 탐방을 다녀왔을 때 압록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북한 땅을 바라보던 중 저만치 앉아 있는 한 여인을 보고 순간 떠오른 시상을 써 내려간 「압록 애인」 같은 시도 비슷한 경우이고요. 지금까지 쓴 시 가운데 삼분지 일 정도는 말씀하신 대로라면 ‘무언가에 홀린 듯 한달음에’ 쓴 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짧은 시 가운데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몇 달 혹은 더 오랜 시간을 들여가며 읽고 또 읽는 가운데 완성한 경우입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대부분은 버려지기도 하지만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제 컴퓨터의 ‘시뜰’이라는 폴더에는 ‘낙서장-진료 대기-진찰실-수술실-회복실-퇴원 대기’의 이름을 가진 작은 방들이 있어 제각기 방을 들락날락하며 퇴고 과정을 거치다가 ‘퇴원 대기’에 들어 있는 시들이 청탁을 받고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비치게 됩니다.

       

 

• 다른 좋은 시들도 많이 가지고 계시지만 독자들이 특별히 사랑하는 시목련여인숙이 있는 시인님께서는 시적 성취 면에서 행복하신 분이시라는 생각입니다. 앞으로도 시인님의 많은 시들이 독자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솔직히 저는 요즈음 시를 읽을 때면 그 시가 그 시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굳이 시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한 사람이 쓴 시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요. 제 주관적인 생각이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부디 크게 노여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느끼는 이런 현상은 어디에 기인한 것일까요? 시인님께서 생각하시는 좋은 시는 어떤 시일까요? 평소에 시인님께서 암송하시는 시가 있으시다면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런지요?

 

• 민감한 문제이고, 저 자신도 다른 분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모르는 일이라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지만, 굳이 말씀드리자면 최근 시를 가르치고 배우는 일들이 부쩍 많아진 현실과도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시를 폭넓게 읽지 못하고, 인터넷 등을 통해 자주 마주치게 되는 시만을 거듭해서 읽는 문화 현상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겠지요. 또한 각종 매체에 자주 언급되고 인기를 끄는 시인들을 추종하거나 서둘러 인정받고 싶은 나머지 유행하는 스타일을 따르려는 시인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겠고요. 좋은 시에 대한 기준은 따로 없다는 게 평소 제가 지닌 생각입니다. 누가 어떤 마음으로 읽느냐에 따라 좋은 시의 기준이 달라지겠지요. 다만 독자로서 제가 좋게 여기는 시는, 시를 읽는 동안 저도 모르게 공감하게 되는 시, 발상의 즐거움을 깨닫게 해주는 시, 미학적 완결성을 보여주는 시입니다. 제가 쓰는 시와는 다르지만, 미학적 완결성을 보여주는 모더니즘 경향의 시를 읽을 때 꽤 큰 즐거움을 느끼곤 합니다. 어릴 때부터 시 암송하기를 즐겨온 편이라 한창때는 백 편이 훨씬 넘는 시를 외기도 했지만, 거의 다 까먹고 지금은 고작해야 이삼십 편 정도 겨우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한용운 시인의 「사랑하는 까닭」,「님의 침묵」, 조지훈의 「사모」, 유치환의 「깃발」, 김춘수의 「꽃」등이 예전부터 즐겨 암송해온 시들이지요. 해마다 첫 수업 시간에는 학생들에게 시를 암송해주곤 하는데, 예전에 비해 즐겁게 들어주는 표정이 아니라 어떻게 할까 고민하곤 합니다.

 

 

• 시인님께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시인은 어떤 분이실까요? 시를 공부하는 문청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시집이나 필독서, 시론집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 특별히 어떤 시인에게서 시를 배운 적이 없다 보니, 시집을 통해 만난 시인들 가운데 몇 분을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네요. 우리 세대가 대부분 그랬듯 저 또한 어릴 때 만난 서정주, 80년대 초에 만난 황지우, 이성복 시인과 1988년 해금 이후에 집중적으로 읽을 수 있었던 정지용, 백석 같은 시인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겠지요. 예전에는 김현, 김준오 선생 등 꽤 많은 분의 시론집을 즐겨 읽었지만, 요즘은 전만큼 시론집을 즐겨 읽지는 않습니다. 가까이 지내는 선후배가 낸 책을 사서 읽는 정도지요. 우리 주변에는 좋은 학자, 평론가가 많고 그분들이 펴내는 책들이 넘쳐나니, 잘 살펴보고 자신의 기호에 맞거나 공부가 될 만한 책을 골라 읽으면 되겠지요. 시를 공부하는 분들이 다양한 시인의 시집을 골고루 찾아 읽어가며 편중되지 않은 시 읽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고요.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에게 어울리는 시 스타일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유명한 시인이나 유행하는 시를 성급히 따르는 대신. 저 또한 여러 선후배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그분들이 지닌 다양한 장점을 찾고, 거기서 저 자신이 지니지 못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는 중입니다.

 

 

• 시인님의 앞으로의 계획과 확장하고 싶은 시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요?

 

1991년에 등단을 했고, 1992년부터 교사 생활을 시작했으니 어느덧 삼십 년이 다 되었네요. 얼마 후면 교직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할 텐데, 학교를 그만두기 전에 시집 두어 권을 더 내는 것, 그 후로는 여행을 즐기면서 오로지 글쓰기에만 전념하는, 말 그대로 전업 시인의 삶을 살아가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나’라는 작은 우물에서 벗어나 더 넓어진 세계와 깊어진 사유를 시에 담을 수 있도록 더 많이 생각하면서, 계속 읽고 또 써나가야 하겠지요. 그런 과정을 통해 저절로 깊어지는 시 세계를 선보일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나 시인님의 시에 대해서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시겠습니까?

 

• 재미없고, 모자라는 구석이 많은 시이지만 많은 분이 제 시를 읽고, 각자의 상처 자국을 들여다보며 아픔을 위로받게 되기를 소박하게나마 꿈꿔 봅니다. 제 시는 ‘나’의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면서 또한 상처를 스스로 ‘치유한’ 과정을 담아낸 것이기도 하니까요. 갈수록 시의 독자가 줄어드는 현실 속에서 시집을 사 읽어가면서 우리 시를 즐겨 읽는 독자들이 늘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저 혼자만의 바람은 아니겠지요.

 

 

 

 

 

 

 

 

고비

 

 

고비에 닿을 무렵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고비를 만나는 법,

하지만 바로 지금, 이라고 여기는 순간

고비는 한순간에 미끄러져 간다

   

너와 함께라면,

뭐든 달게 받아들이리라 하던 때가 있었으나, 돌이켜보면 정작 큰 고비는 바로 너와 나, 우리들 자신이었다

   

그해 여름,

나는 무딘 손끝으로는 만질 수 없는 지도 밖 모래언덕에서 방울뱀처럼 똬리를 틀고 신기루의 몸을 흔드는 너를 어떻게든 만나고 싶었다

   

사막에서 태어났으나 거기에서 버림받은 낙타는,

날마다 저를 낳고 버린 모래언덕의 품에 안기는 꿈을 꾸었지만 여태 울타리 밖으로 다리 한번 내밀어 본 적 없었다, 되려

   

허구한 날 겁먹은 표정으로 뒷걸음치며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허나

   

다시 너와 맞닥뜨리는 때가 오면 맨몸으로 너를 맞으리라, 그러나

   

이미 나는 고비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시집 『너무 많은 당신』)

 

 

 오랜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신 겸손하고 사려 깊은 시인께 감사와 존경의 말씀을 전하며 시인의 말씀들로 인터뷰를 맺고자 한다.

 

A.

나는 내게 묻는다. 나는 시인인가? 어제 물었던 그대로, 오늘 또 내게 묻는다. 나는 시인인가?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던져온 이 물음을 나는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시를 쓰는 일은 어쩌면 ‘신기루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사라지는 해협(海峽)을 건너기 위한’ 도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징검다리가 놓일 때마다 바다의 건너편은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두 번째 시집 ‘자서’에서). 그럴수록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가며, 다가가려 할수록 멀어져만 가는 해협을 건너기 위해 계속 쓰고 또 써야만 할 것이다.

 

 

시에 관한 한 나는, 무모하리만치 비타협적이다. 한 마디로 맹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나는 나의 ‘맹함’을 사랑한다. 그것을 버리는 순간, 어쩌면 나는 이미 시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B.

시인은 단순히 언어를 다루는 기술자가 아니다. 시인의 언어는 수단을 뛰어넘어 스스로를 추구하려는 기질을 지닌다. 나는 언어를 능숙하게 다루는 시인이 되기보다는, 언어와 더불어 살과 마음을 섞어가며 한세상을 살고 싶다. 한 편의 시로 부화할 순간을 기다리며 도처에 숨어 있는 키 작은 존재들을 찾아 매 순간 길을 나서고 싶다. 이제는 ‘나’의 작은 틀을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자리에서 ‘시’를 고민하고 꿈꾸고 싶다.

 

외로운들, 삼류인들 어떠랴! 그렇게 시인으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참말!

 

 

C.

시인의 한 마디는

단말마,

 

그가 선 자리는

어디라도 벼랑이다.

-「시인」전문

 

…… 고비 아닌 때가 없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시인일 것이다.

 

 

 삼류는 자신을 솔직하게 삼류라고 하지 않는다. 고비 아닌 때가 없었지만, 시인으로 태어나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시인으로 살아갈 시인에게 신의 은총과 가호가 함께 하기를 바란다. 시인 외에는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은, 그는, 천생 시인이다.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시인이다. 내게도 기꺼이 단봉낙타(시인의 별칭)에 승차할 수 있는 시적 에너지가 아름다운 병처럼 옮기를 바라며 카페 문을 나서자, 피로 물든 가을하늘 아래 은행잎 하나가 내 발 아래 툭, 떨어졌다. 마치 석양이 낳은 한 편의 시처럼......

 

 나는 병아리가 알을 품듯, 노란 은행잎 하나 주워들고 가슴에 꼬옥 안아보았다.

 

 

《박완호 시인》

 

충북 진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 『기억을 만난 적 있나요?』 『너무 많은 당신』 『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다』 『아내의 문신』 『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 『내 안의 흔들림』 등. 김춘수시문학상 수상. 풍생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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