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이 분홍을 떠나지 못하는” 사랑의 분홍 팅커벨, 이우디 시인과의 인터뷰

홍수연기자 | 기사입력 2020/08/29 [10:37]

“분홍이 분홍을 떠나지 못하는” 사랑의 분홍 팅커벨, 이우디 시인과의 인터뷰

홍수연기자 | 기사입력시간 : 2020/08/29 [10:37] | 조회수 : 139

 

  © 한국예술문화타임즈



〔문단소식〕“분홍이 분홍을 떠나지 못하는” 사랑의 분홍 팅커벨, 이우디 시인과의 인터뷰

 

 

2020, 분홍이 분홍을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불안이 불안을 떠나지 못하는 봄날 // 오늘의 마스크가 필요한 오늘, 가위에 약지를 걸고 마스크를 쓰고 머리카락을 잘라요 흩날리는 새들을 불길한 불길 속에 처넣을 순 없어요 검은 물감은 풀지 말아요 당신() 뜻대로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요

                                                   

                                시인의 시「바닥을 구르는 분홍을 위한 레퀴엠」에서

 

 

© 시인뉴스 포엠

 

 

 제주에 사는 시인은 화려한 용모와 달리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헛헛해 보였다.(대체적으로 시인들의 분위기란 그런 것이기도 하다.) 마치 작은 새장 속에 갇힌 성장盛裝한 새처럼 시인은 지상을 박차고 금세라도 날아오르고 싶은 욕망을 분홍 붓으로 애써 토닥이고 있는 듯 보였다.(하필 그날의 의상도 분홍이었다.) “선녀와 나무꾼”의 “선녀”가 연상되는 자태를 지닌 시인은... 다른 점이 있다면 “선녀와 나무꾼”의 “선녀”는 스스로 날개옷을 찾아내었지만, 시인은 스스로 감춘 날개옷을 애써 모른 체 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를까?... 이것은 시인의 시를 오랫동안 탐독해온 나의 지레짐작에 연유한 편견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시인은 세상 풍파를 올곧게 겪어낸 자만이 낼 수 있는 원숙한 음성으로, 나와는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지만, 금세 ‘언니’ 하자고 조르며 인생사 다 털어놓고 싶은 넉넉한 품새를 지니고 있었다.

 

 시인과 나와의 첫 만남은 시향(詩香)이라는 시 밴드를 통해서였다. 2017년 봄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나는 다니던 직장을 명퇴하고 오랜 꿈이었던 시를 다시 쓰기 위해서 이 밴드 저 밴드를 유랑하고 있었다. 문정완 시인이 운영하는 시향(詩香) 밴드는 시 꽤나 쓴다는 무사들이 저마다 무림에서 오랫동안 갈고 닦은 무예를 자랑하고 있다는 소식을 오래전부터 접해 왔던 차였다. 그 곳에서 머리칼을 노랗게 탈색한, 범상치 않은 외모의 시인을 만났다. 그 때에도 시인은 이미 영주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한 시쳇말로 잘 나가는 시조시인으로서  문단에서도 밴드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기성시인이었다.

 

 

 시향(詩香)에서의 시인은 습작생들의 시를 빠짐없이 다 읽고, 일일이 표정을 달아주며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항상 겸손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지닌 시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람들을 하등의 편견 없이 대할 수 있다는 것은 최고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유달리 부침浮沈이 많은 시 밴드 특성상 많은 문우들이 다녀갔고 사라졌고 또 새로운 문우들이 먹을 갈며 붓꽃을 피워내다 어느 날 홀연히 밴드를 떠나갔다. 그렇게 4년이 흘렀다. 그 사이 시인은 몇 권의 시조집과 시집을 출간했으며 어느덧 문단의 중견시인으로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변함없이 지금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몇 안 되는 시인 중 한 명이지 싶다. 시인의 불꽃같은 시에 대한 열정과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시에 대한 열망과 성실함이 시인을 오늘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도 시인은 밴드의 시 감상 코너에 시인이 읽은 좋은 시를 소개하고 운영하는 블로그(“혀에 피는 꽃”)에 다른 시인들의 시를 올리며 읽고 배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물론 문단에 시를 발표하는 일 또한... 그의 귀는 항상 열려 있으며 그의 작은 입술은 지치지 않고 영혼의 물을 퍼 올린다. 밴드에서 시인을 보지 못했던 날은 시인이 어깨 수술을 해서 병원에 입원해있던 며칠간과 시인의 시모 장례기간 그 며칠 간 뿐이었다. 이제는 밴드에서 활동하는 것이 시간 아깝게 생각될 위치에 있음에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순교자의 그것처럼 시의 분홍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이 매화꽃 같은 시인의 詩 香 속으로 나는 기꺼이 걸어 들어가 보기로 한다.

 

 

 

《대표 시 모음》

 

 

낮고 푸른 당신

 

 

탑은 무너지는 중이다

의도적이지 않다

하루에 또 하루 얹으면 새벽이 온다

새벽을 시작하면 축축한 말문이 막힌다

해가 지면 동태를 상상한다

의도적이다

 

지구만 한 냄비에 e-노을을 깔면 눈동자가 풀린다

 

어떤 계절도 접속 가능, 폭설로나 오는 스팸은 삭제 키를 누른다

굉음을 뚫고 착륙하는 비행기

앞장서지 않으며 그렇게 오는 시녀 같은 봄, 이 세계는 취한다

 

휠체어에 앉아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플라스틱 사랑에 접속한다

 

나도제비난이 입술을 깨무는 오후 세 시

녹아내린 아랫도리에 모르핀이 꽃을 피운다

헛구역이 창궐한다 화입(火入)을 한다

 

패시지*와 패시지 사이가 전설보다 긴 하루

 

* 독주 기악곡에서, 곡의 중요한 부분을 서로 연결해 주는 악구

 

 

 

눈물이 오늘의 강물을 주고받을 때

 

 

이브는 에덴을 잊었다

- 야생의 기억까지는 덤에서 무덤 그리고 무덤덤

에덴은 이브를 부인했다

푸른 사과 하나 떨어지고

추억의 입술과 한 뼘 더 멀어졌다

인적 없는 바깥이 왔다

- 혼몽의 시간

외로운 눈에 비친 명랑한 분홍

낮달맞이꽃이 핀다

구름엔 난간이 없어 미끄러진

비가, 손뼉을 치며 지나간다

쇄골에 걸린 구름이 당신의 출처를 물으면

젖은 불빛이 입을 연다

빨랫줄에 걸린 빗방울들 은밀하게

연두를 잉태하는 사이 나는,

어딘가를 궁리한다

 

검은 심장이 뿌리를 갖고 놀다가 재만 남긴 날

한 사람이 오면 한 사람이 떠났다

 

너와 나 사이의 간격

- 오차는 0.5 남짓 / 아름다운 꿈이 모인다

 

몸은 산문 마음은 운문

 

온몸에 먹자둣빛 멍이 피었다

 

 

 

바닥을 구르는 분홍을 위한 레퀴엠

 

 

  죽지에 돋는 무수한 날개로 부신 허공은 마지막 성소, 뿌리에서 멀어질수록 불안한 이들을 위한 아다지오 d단조는 빛을 위한 가락이에요

 

  천칠백만 년 전 한잠 지나 수목 뿌리 걸어 나온 구름 궁전 시계처럼 집도 절도 없이 지하 도시 탈출한 분홍 달팽이, 호주 란셀린 시티 사막의 언덕 너머 모래 썰매 타고 와 파도에 환승한 이후 발을 헛디뎌요

 

  35년여 은백색의 가윗날에 홀릭, 입술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쏟아지던 문장들

 

  아이 놓친 앳된 엄마의 상심과 다른 여자와 남편을 공유한 아내의 분노 그리고 사랑한 적 없는 남자의 우울을 어떻게 잊어요 약혼한 스물두 살 분홍 눈빛과 결혼 25주년 스물 다섯 송이 장미에 취한 쉰한 살 설렘도 소개팅에 성공한 사십 대 총각의 흥분도 절대 못 잊어요

 

  2020, 분홍이 분홍을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불안이 불안을 떠나지 못하는 봄날

 

  오늘의 마스크가 필요한 오늘, 가위에 약지를 걸고 마스크를 쓰고 머리카락을 잘라요 흩날리는 새들을 불길한 불길 속에 처넣을 순 없어요 검은 물감은 풀지 말아요 당신() 뜻대로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요

 

  바닥에 풀려버린 비문을 위한 성가가 필요할 뿐

  우리는 우리를 믿어요

 

 

 

• 언젠가 꼭 한 번은 뵙고 싶었던 시인님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무척 반갑습니다. 오늘 헤어와 의상 역시 시인님처럼 흐트러짐 없이 멋지십니다. (웃음) 밴드에서 현재까지 4년간 시인님을 뵈면서, 시인님을 시작詩作에 이르게 한 계기가 무엇일까? 항상 궁금하였습니다. 무엇이 시인님을 시의 자리로 이끌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 반갑습니다. 시향(詩香)에서 무척 궁금했던 시인 중 한 명이었습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그림보다 새까만 글자가 좋아 시작한 숨박질이 아직 끝나지 않았나 봐요. 글자를 가지고 놀고 있으니... 숙명인가요? (웃음) 글자를 모르면서 글자를 술래가 되어 찾아다니다 보니, 이 자리네요. 처음 들어간 종암동 숭례초등학교에서 교과서를 받아와 책을 쌓아놓고 읽던 그 날 이후 지금까지 책으로 숲을 짓고 그 곁을 흘러왔네요. 뭔지도 모르면서 중얼중얼 읽고 썼던 기억이 5월 한 귀퉁이 녹다 만 눈처럼 남아있어요.

 

 

 

• 저는 시 공부를 하면서 가장 먼저 읽은 시집이 김수영 시인의 『거대한 뿌리』였습니다. 그리고 박노해, 백무산 시인의 시집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도 모르게 사회참여적인 시, 메시지가 강한 시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즈음 늦게 하린 시인의『시클』을 밑줄 그어가며 읽고 있습니다. 아래는『시클』에서 하린 시인이 인용한 아치볼드 맥클리쉬의「시법」중 일부분입니다.

 

 

시는 구형의 과일처럼

감촉할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엄지손가락에 닿은 낡은 훈장처럼

말을 못해야 한다

이끼 자라는 창턱의

소매 스쳐 닳은 돌처럼 침묵이어야 한다

시는 새의 비상과 같이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시는 시간 안에서 움직임이 없어야 한다

달이 올라올 때

마치 그 달이 밤에 얽힌 나무들에서

가지를 하나하나 놓아주듯이

겨울 잎사귀에 가린 달처럼

기억을 하나하나 일깨우며 마음에서 떠나야 한다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시는 동등할 것이지

진실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온갖 슬픔의 사연에 대하여는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

사랑에 대하여

기울어진 풀들과 바다 위의 두 불빛

시는 의미할 것이 아니라

다만 존재하여야 한다.

 

 

 이 글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시인이 이우디 시인님이었습니다. 이우디 시인님의 시야말로 가장 시다운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제가 추구하고 좋아하는 시를 다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시인님이 생각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시 혹은 가장 좋아하는 시는 어떤 시인지요?

 

 

• 상상을 구체화한 를 좋아합니다. 삶의 기본은 사랑이라 생각하는 이유로 세상의 모든 사랑을 위하여 상상하고 자료를 찾고 음악을 듣고 인터넷을 뒤집니다. 철학을 기웃거리며 내게 먼 대륙을 집적거리게 되죠. 오지랖이 지구 서너 바퀴는 돈 듯... (웃음), 그리고 시를 읽었을 때 상상을 부추기는 가 있어요. 그런 를 좋은 시라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강인한 시인 조정인 시인 박지웅 시인 김경주 시인 등의 가 내 상상을 자극하는 , 상상에 날개를 달아주는 , 입니다. 제게는 좋은 가 좋은 스승입니다.

 

 

• 대표 시 세 편은 지금까지 제가 읽은 적이 없는 신작시 3편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시인님의 시를 지극히 사랑하는 독자 중의 한 사람이지만, 시인님의 어떤 시는 마치 주술사가 언어의 고치를 풀어내듯 화려하고 어질한 시어의 향연이라서 시의 깊이가 시어에 파묻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시도 있었습니다. 최근에 작업하고 계신 시들은 예전에 쓰시던 시와는 조금은 달리, 대중성이 있어 보여서 저는 더 좋습니다. 이렇게 보다 보편적인 방향으로 시 작업이 바뀌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 별나게 밝으면서도 자주 도피하는 아이가 있었죠. 외부의 간섭은 없었어요. 스스로 사라지는 것을 소망하던 아이였죠. 어렸을 적부터 뜻도 모르는 니체의「신은 죽었다」를 읽고 D. H. 로렌스의「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읽고 도스토옙스키의「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그 외 나이에 맞지 않는 수많은 책을 읽었죠. 두꺼운 책 속으로 숨어들었던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에리히 프롬과 루이제 린저를 만나면서부터 수줍은 대화를 시작했어요. 그렇게 시작한 , 였어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운 적 없는 사람이 를 쓴답시고 끄적이다 보니 이름 붙일만한 특별한 뭐가 없었습니다. 공상과 상상에 빠져 살다 보니 가 몽환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거기에 현실적인 조미료를 첨가해서 요리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죠. 다만 를 써야 사는 것 같고 잠이 오고 밥을 먹을 수 있어 시작한 , 가 아름답기만 하겠어요? 좌충우돌 무한한 시행착오는 기본,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제 삶의 흐름이 나를 그쪽으로 흘러가게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대중적인 누구나가 쉽게 읽고 감동하는 를 써야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있었지만, 제겐 너무 어려운 일이었어요. 쉬운 게 가장 어렵더군요. 조금이라도 바뀌었다니 즐거워집니다.

 

 

• 시인님의 시에 가장 많이, 가장 자주 등장하는 시어를 찾으라고 하신다면 저는 두말없이 “분홍”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인님에게 “분홍”은 무엇을 의미하고 상징하는 것일까요?

 

• 무심할 수 없는 색인 건 분명합니다. 시작도 詩作도 분홍으로부터 왔어요.

재치도 없고 주변머리도 없지만 피할 수 없는 분홍은 사랑입니다. 사람을 가정을 사회를 그 모두를 분홍에 가두고 싶습니다. 아기의 속살 같은 분홍은 절 흥분시켜요. 그렇게 여리고 아픈 마음들을 사랑하고 싶다면, (웃음) 과한가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에 빠져들수록 는 생존이란 생각이 듭니다. 세상의 모든 울음이 궁금하고 달빛이 달동네 어루만지는 것을 보면 땅에 떨어진 달빛 주워 저글링을 하고 싶어집니다. 천성이 가난하면서 저열하고 때론 음탕하고 절망에 물을 주고 정상은 아닌 나는 나의 라이벌, 지극히 인간적이지만, 속 다 비운 원초적인 사유를, 꿈이라도 꿉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광기에서 탈피, 세상에 쏟아지는 파랑을 만지는 일. 하시라도 책 냄새 킁킁거리며 책장 넘어가는 소리에 전율을 느끼는, 나를 쓰는 일, 은 분홍입니다.

 

 

 

 

첫눈

 

 

햇빛보다 달빛이 더

좋은 나이라서요

 

달빛조차 함부로

나부끼는 소설이면

 

바닥난 내 그리움도

올이 톡 풀리고 그래요

 

일출보다 일몰이 더

좋은 나이라서요

 

별빛조차 대놓고

나부대는 소설이면

 

철없는 내 마음 하나

턱없이 놓치고 그래요

 

(시집『썩을,』고요아침, 2017)

 

 

 

꽃의 구구

 

 

1.

나의 꿈속 한 칸은 애틋한 두근거림, 채송화 사루비아 앙증한 원고들은

탈고란 해본 적 없는 열아홉의 분홍 서시(序詩)

 

 

들끓는 혈관들은 단 문화에 취해서 겁 없이 판타지(fantasy)에 유배된 서른다섯

예감은 밀주(密酒) 같아서 나란 기억에 취한 계절

 

마흔 해 꽃 진자리 무덤일 리 없다며 루머처럼 유머처럼 흐르는 하현의 달

상처도 꽃이라 말한 그 입술이 슬프다

 

아주 가끔 당도한 신들린 데모 버전, 기꺼이 그 연애의 포로가 되고 싶은

꽃들의 신경 세포에 갱년기는 없다는 듯

 

먼 곳 돌아와 누운 절망 대신 홀린 듯 꽃몸살로 불을 켠 노을도 저물 무렵

살풀이 살풀이하듯 헛꽃 활짝 피우다

 

2.

분내 나는 이승의 정년을 누가 알까 구름꽃 흩어지는 한가을 요양원서

만다라 꽃빛에 홀려 적멸에 든 아버지와

 

장구 장단 산조에 구절초 꽃 진 저녁 저 순한 봉분 없는 젖무덤이 서러워

속눈썹 파들거리는 결구뿐인 어머니와

 

발바닥 붙인 채로 언 강을 호명하는 물억새 몸결 따라 춤추는 파장 무렵

혼절한 내 사무침의 배후인 나를 깨우다

 

3.

불길로 오른 계단 불티로 내려오며 영으로 시작되는 한 단 뿐인 문장을

흰나비 날갯짓하듯 복송하는 꽃의 구구(九九)

 

(시집『강물에 입술 한 잔』고요아침, 2019)

 

 

 

껍데기를 채록하다

 

 

어느 미친 봄날에 너는 단종되었다

가벼운 듯 무거운 이별은 눈물 한 채

새빨간 거짓말처럼 피고 싶다고 피는 꽃

 

고독도 퇴고하면 시집 한 권 출판할까

노을 첩첩할수록 되작되작 추억질

끝장난 꽃 시절이야 꽃샘잎샘도 오타인 걸

 

 

당신 몸 벗어놓고 나는 품절되었다

억겁이랴 억 겹이랴 과거와 미래 사이

뻥 뚫린 싱크홀 같은 내 마음속 사리 하나  

 

(12회 젊은 시인상 수상작품)

 

 

 

2014년 영주일보 신춘문예에 시조로 등단하시고 동() 해《시조시학》등단, 2018<젊은 시인상>수상, 2019년도에《한국동시조》에 등단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조시인으로서 가장 아끼는 시조는 어떤 시조인지요? 그리고 그 까닭은 무엇인지요?

 

• 먼저 시조(時調)를 알게 된 계기부터 설명해야할 것 같네요. 사실 어려서부터 를 써왔어요. 라고 이름 붙이지 못할 지만, 그러다 운명처럼 만난 시조(時調)가 있었어요. 인터넷 카페〈시하늘〉시조방에서 김석근 선생님의 반 잔, 이란 시조를 만난 건 운명이었나 봐요. (웃음)

 

 

나의 술잔에는 반 잔만 따라다오

반 남은 빈자리에 네 눈빛 채워 다오

내 가슴 빈 화로에다 불씨로 묻어두게        ㅡ반 잔, 김석근

 

이 시조에 빠지면서 시조에 미쳤지요. 2014, 그리고 그 방에서 이태호 선생님을 만났고 어깨 너머로 6개월 남짓 배웠던 것 같아요. 그게 계기가 되어 오승철 선생님도 만나게 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주로 이사 온 이후의 일입니다. 제주가 제겐 선물인 거죠. 그리고 가장 아끼는 시조는 백수 정완영 선생님의 분이네 살구나무와 조운 선생님의 석류(石榴)입니다.

 

 

동네서 젤 작은 집 분이네 오막살이

동네서 젤 큰 나무 분이네 살구나무

밤사이 활짝 펴올라 대궐보다 덩그렇다.     ㅡ분이네 살구나무, 정완영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젖힌

이 가슴.                            ㅡ석류(石榴), 조운

 

 따뜻하고 숨결이 느껴지고 무엇보다 아름답잖아요, 36구 밑을 흐르는 깊은 강물 같은, 이런 시조를 쓰는 게 꿈입니다.

 

 

 

21

 

 

시작은 덜컹대는 침묵이었어요

관계는 소란했지만

우리 앞의 강물은 멈추지 않았어요

청평 설악호텔에서 깨어난 강변의 아침

창호지 문을 밀어내는 햇살이 나를 건드렸어요

선명해진 생각이 문을 열자

탄성이 찾아왔어요

이부자리까지 중얼중얼

들어오는 햇살이 나를 통과한 순간

얼음 품은 맥주 생각이 났어요

한 사람은 보이지 않고

영화보다 진실한 풍경 속에서 기다림이 궁금한 내가,

문득 추운 내가,

얼음이 되고 싶었어요

한 잔이 한 병으로 한 병이 두 병 세 병으로 가는 동안

햇살이 부끄럽긴 해도 뭐, 어때요

한 사람이 돌아오는 시간은 아름다워요

오래전 나를 결정한 아침이 있었어요

아델(Adele)*의 숨소리 요동치는

콘솔 위, 부루칸테 꽃잎 테두리 붉은 줄을 읽다가,

그날 붉은 한 줄 들여다보다가

서두르지 않고 따뜻해져요

 

창 밖은 그때, 우리 관계처럼 소란하지만

자동차 소리 빗소리 아침이 붐비는 소리

개평처럼 흐르는

내 안의 흥얼거림까지

청평의 기운이 강물처럼 흘러요

추억은 가끔

 

허기를 달래기도 하나 봐요

 

당신을 써야 할 이유가 빗소리를 적셔요

 

 * 영국 가수.

 

(시집『수식은 잊어요』황금알. 2020)

 

 

 

셰인*

 

 

 새털구름을 히치하이크하는 사슴이 있다

 

 흘러가다 멈춘 음악처럼, 언젠가 떠날 사람처럼, 그러니까 숙명이라

 잠시 머물다가 먼지 속 떠도는 호흡이다가

 

 서부 개척사의 한 페이지에 끼워 놓는 거기까지가 나의 전생 일지 모

른다

 

 목이 말라도 물을 참는 나를 본다

 

 겁없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덤터기 쓰다가 줄거리 없는 생을 소모하다가

 

 모면할 길 없는 탄피로나 남는 여기까지가 한 치 앞일지 모른다

 

 자막에 남아 있는 검은 활자는 쏠 듯 말 듯 쏘지 못하는 총잡이 사내

 

 꽃은 필까, 궁금해진다

 

 부사 형용사 살진 관념어만 쳐들어오지 않는다면, 국경 언저리 들개처럼 남아있을 시()를 기다려

 

 오늘 나는, 당신을 쓰는 것이다 당신의 이름으로 나를 쓰는 것이다

 

 * 셰인(Shane) : 미국 영화.

 

(10회 『문학청춘』신인상 수상작품)

 

 

 

 

• 시든 시조든 시인님 시의 주제를 저더러 말해보라면 저는 서슴지 않고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다만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것은 시인님의 시에 등장하는 “당신”이라는 존재입니다. “당신”이라는 그 존재는 실존 인물일까요?

 

• 세상의 모든 물질입니다. 모두가 애인인 걸요, 내가 가장 무서운 애인입니다. (웃음)

 

세상의 모든 애인에게 보내는 들꽃 같은 쪽지 한 잎, 괜찮죠?

 

바람이 분다, 하얗거나 까만, 백지를 꺼낸다.

이성도 오감도 열반에 들녘

무릎 꿇어 너에게 입 맞출 수 있다면

거기, 어디라도 나는 가야 한다.

바람이 자는 시간은 공포다.

답 없는 물음이야 세월에나 맡기고 분홍 자벌레 한 마리 영혼의 체험을 떠난다.

 

바타이유는 ‘내적 체험’을 재앙이라 했지만,

 

무심히 티니 헤어에 입성한 오색 무지개 꼬드겨 굴렁쇠를 굴릴 수만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나는 쓴다. 써야 한다.

 

어쩌면

ㅡ아틀란티스의 속삭임을 들어야 한다.

 

 

 

진달래꽃

 

 

열 손가락 모자라 헤아리지 못합니다

피었다 진 날들,

 

꽃빛 잊었는지

아니 행복한지

궁금한 그 사람을,

 

아직도 잊는 중입니다

 

(시집『수식은 잊어요』황금알. 2020) 

 

 

 

• 시「진달래꽃」은 시인님의 시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입니다. 저는 아무리 많은 시집을 출간하고 평론가들과 매니아 층에서 지지를 받고 있는 시인이라 할지라도 독자들에게 애송되는 시 한 편이 없다면, 그 시인의 시 작업은 과연 성공한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모르스 부호로 가득찬 시, 형상화에는 성공하였지만 객관적인 성취를 이루어내지 못한 시들을 배제하는 경향이 제겐 있습니다. 저는 시는 가요와 가장 맞닿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성이란 트롯 가수가 30년 넘게 무명생활을 하다가 “안동역에서”란 노래를 히트시킴으로써 일약 그는 국민가수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시인들도 그렇게 국민들에게 회자될 시 한 편, 딱 그 한 편을 위해서 쓰고 또 쓰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 「진달래꽃」은 과히 국민가요, 국민 시가 될 만한 충분한 요건을 갖춘 시라는 생각입니다. 이 시는 가슴 한 가운데를 예리한 칼로 베인 듯한 아픔과 첫사랑의 설렘과 같은 환희를 동시에 제공하는 좋은 시라는 생각입니다. 누구나 이런 사연 하나쯤은 간직하며 살고 있을테니까요. 짓궂은 질문인 줄 잘 압니다만, 이 시를 쓰시게 된 배경을 여쭈어 보아도 괜찮을까요?

 

• 사실 여기서 그 사람은 를 염두에 두고 쓴 거예요,

대부분의 제 사랑 를 혀 밑에 숨기고 쓴 거라서 딱히 다른 할 말은 없어요.

 

이 시는 오래전에 써놓은 긴 하지만 제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 같아서 수줍은 척 제일 끝에 슬쩍 올려놓은 것이었어요. 마음이 복잡하죠. 가도 가도 없는 당신 때문에 당신도 나도 행복하지 않아서요, 하지만 요즘은 당신에게 가는 동안이 행복이란 걸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아요. 당신이 애인이든 친구든 선생님이든 동생이든 엄마든 아버지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를 쓰는 한, 그 가난한 사랑은 영원할 텐데요.

 

 

• 시 밴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인 지망생들에게 선배시인으로서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 저는 밴드 시향(詩香)에 애착이 많아요. 거기 모든 시인 지망생 또한 모두 특별한 애인입니다. 저보다 좋은 환경에서 詩作하는 젊고 똑똑한 후배들을 보면 좋으면서도 저와 같은 시행착오를 겪는 걸 보면 속상하죠.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지만, 아직 그만한 능력은 없는지라, 그래서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時調 중에서 나름 고르고 골라 소반(小盤)에 올리는 걸로 제 마음을 전할 뿐입니다. 뭐든 열심히 하면 끝은 있는 것 같아요. 특별한 내 애인들도 그걸 알아챘으면 좋겠습니다. 기가 죽을수록 죽기 살기 저처럼 더 바락바락 대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시향(詩香)을 이끌어 나가는 뚝심 센, 시를 씹어 먹는 동생 같은 친구 같은 문정완 시인에게 지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지칠 리 없지만... (웃음)

 

 

• 앞으로의 계획과 확장하고 싶은 시세계를 알고 싶습니다.

 

• 열심히 하는 것만이 목적인 사람이 무슨 계획이 있겠어요. 안 쓰면 할 일도 없고 딱히 살아야 할 이유도 없을 것 같은 사람이거든요. 그저 물 흐르듯 닿는 곳이 어디든 막히면 돌아 돌아 거기 어디든 갈 겁니다. 누가 읽어도 읽는 가슴이 뜨겁거나 차가워질 수 있다면 행복하겠죠. 그날이 오든 안 오든 그날까지 혼자, 그 길을 갈 겁니다.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나 시인님의 시에 대해서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말씀하여 주시겠습니까?

 

•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리 없지만, 언제나 첫 느낌으로 독자 마음대로 읽어주시면 감사하죠. 시집에 실린 는 더는 제 가 아니란 생각을 종종 해요. 제 시가 어떤 쪽으로 흘러가도 많은 응원을 바랄 뿐이죠.

 

 

 

 시인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시인의 샵(“티니헤어”)을 나설 때 시인은 함박꽃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는 인생을 잘 살아낸 자만이 지을 수 있는 당당한 미소라서 멋지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또한 그 미소는 섹시하고 도발적인 미소라서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못할 미소이기도 하였다. 시인은 60을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아름답고 초롱초롱한 여자였다. 아니 70, 80을 넘어서도 시인은, 죽을 때까지 시인은 사랑 하나 간직한 채, 여자임을 포기하지 않을 시인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시가 있어서 더 빛나는 그, 채 다 비워내지 못한 시에 대한 열망으로 더 반짝이는 그와 후일을 기약하며 작별의 포옹을 나누었다.

 

 이토록 섹시하고 아름다운 시인이, 분홍 붓 끝으로 무엇이든 톡 건드리기만 하면 꽃으로 변하는 마술을 행사하는 제주에 사는 분홍 팅커벨 같은 시인이 시인을 넘어서 국민 시인이 되는 날까지, 시인의 시가 교과서에 실리는 날까지 나는 열렬히 시인을 응원하고 지지할 것이다. 어떤 부분 시인은 나의 롤 모델이기도 하므로, 롤 모델인 시인이 시적 성취를 이루어내는 그만큼 나 또한 따라가기 위해 거북이 같은 걸음이나마 잃지 않을 것이므로...

 

 시인과 만난 시간들이 빛난다. 시인과 만난 시간들이 사랑으로 환하다. 시인은 반드시 국민시인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고 말 것이다. 내가 그렇게 믿음으로... 시인의 시가 그렇게 믿음으로...

 

 

《이우디 시인》

 

서울 출생, 제주도 거주. 2014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2014년 《시조시학》 등단. 2019년《문학청춘》시 등단. 2019년 《한국동시조》 등단.

시조집『썩을,, 현대시조100인선 『강물에 입술 한 잔』, 시집『수식은 잊어요』. 12회 시조시학 젊은시인상. 2017, 2020년 제주문화예술재단 문예창작지원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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