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선박사] ‘죽음’의 문제: 자연사가 마지막 행복이다.

나벽솔기자 | 기사입력 2020/04/27 [13:00]

[윤명선박사] ‘죽음’의 문제: 자연사가 마지막 행복이다.

나벽솔기자 | 기사입력시간 : 2020/04/27 [13:00] | 조회수 :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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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V. ‘죽음’의 문제: 자연사가 마지막 행복이다.

 

  생물학적으로 죽음이란 육신의 생명이 끝나는 것을 말하지만, 종교에서는 영혼을 인정하고,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것을 죽음이라고 본다. 노년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절대고독에서 해방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분명한 것은 죽음은 피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자연법칙을 그대로 받아드림으로써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고통을 극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해 필요하다. 죽음을 준비를 하면서 더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마지막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생명권은 권리인 동시에 의무이기도 하므로 자살은 인정되지 않으며, 존엄사가 마지막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참된 신앙을 가지면 죽음의 문제를 보다 쉽게 해결할 수 있다.

 

(1)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까?: 이것이 노년의 최대의 과제이다.

 

  인생의 말년에 맞이하는 중대한 문제가 ‘죽음’이다.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행복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죽음에 대한 공포의 극복’이라고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지만,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갈린다. 죽음은 인생의 종말이라는 생각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슬픔으로 인도한다. 분명한 것은 생명은 바람처럼, 구름처럼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이다. 이 진리를 깨닫고 수용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불안과 고독과 고통이 뒤따른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미래의 것으로 생각하고 현재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의 부단한 도피”라고 했다.  

  삼라만상이 다 빈 것()이다. 죽음은 자연법칙으로 피해갈 수 없으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 인생이란 “묘지로 가는 길”(토마스 만)이다. 죽음은 인생의 끝자락에 놓여있는  과정의 한 부분이다.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 과정임을 수용하면 죽음의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루크레티우스는 “너는 너의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하고 준비를 하는 것이 삶을 완성하는 길이다.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준비를 하느냐에 따라 인생길이 달라진다. 철학은 이성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하고, 종교는 사후세계를 제시함으로써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들은 여러 단계로 진전된다는 견해가 있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의 과정을 부인단계, 분노단계, 타협단계, 저항단계와 순응단계의 5단계로 나눈다. 그러나 이들은 죽음에 대한 반응의 종류를 열거하고 있는 것으로 사람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반응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접근방법은 적절치 않다.

  노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은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종교에 귀의하게 된다. 종교의 기능은 죽음 그 자체를 막아주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없애주는 데 있다. 죽음이란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로써 왔다가 돌아가는 순환과정의 이동일 뿐이므로 이 사실을 그대로 수용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죽음의 문제는 해결되고,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이때에 노년은 평화스럽고 평안한 삶을 누리다 저 세상으로 갈 수 있게 된다.  

 

(2) 죽음의 의미는 ‘입장’에 따라 다르게 이해한다.

 

 

  죽음은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덧없이 찾아오므로 그 의미를 고민해 보아야 의미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다. 죽음의 의미는 문화·종교·건강상태·심리적 특성·사회적 관습 등에 따라 다르지만, 결국은 자신이 어떻게 받아드리느냐에 달려 있다. 비록 죽음의 의미를 알지 못하더라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절대고독을 극복하면서 인생의 말년이 평안할 수 있다. 그 해결방법은 ‘영혼’을 인정하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 양자의 관계에 관하여 극복할 수 없는 입장의 대립이 있다. 데카르트는 영혼과 육체는 독립된 별개의 것으로 보았는데, 이를 ‘심신이원론’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하여 스피노자는 육체와 영혼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로 보았는데, 이를 ‘심신일원론’이라고 부른다. 양자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죽음의 의미가 달라진다.

  유물론적 입장에서는 사후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사망은 ‘원소의 분해’ 또는‘세포의 소멸’로써 인생의 종말이라고 본다. 정신은 뇌 세포 활동의 산물로써 육체와 일체를 이루고 있으며, 사망과 함께 정신도 사라진다고 본다(심신일원론). 에피쿠로스는 인간이 죽으면 천상의 원자로 돌아간다고 하면서 의식·이성·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즐거운 삶에 필요한 요소라고 했다. 이 입장이 무신론이 이해하는 죽음이다.

  영혼을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것을 죽음으로 본다. 종교에서는, 천당이든 극락이든, 사후세계를 인정함으로써 죽음이 인생의 종말이 아니고, 사망으로 인해 분리된 영혼은 그곳으로 가서 영생을 누린다고 한다(심신이원론). 영생의 문제는 신앙의 문제로 믿느냐의 여부는 자신의 신앙에 달려 있다. 영혼은 신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무신론자들은 이를 수용할 수 없다. 그런데 노년에는 영성이 강해지고 영혼을 인정하면서 종교에 귀의하는 경향이 있다.  

 

(3) 생물학적으로 ‘죽음’은 피해갈 수 없다.

   

  생명은 유한한 존재요, 일정한 과정일 뿐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인생의 1/4은 성장하는 기간이지만, 3/4은 노화하는 과정이다. 인생이란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존재이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제행무상(諸行無常)으로 설명한다. 모든 것은 변하며, 생명도 일정한 과정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괴테도 죽음을 한탄했다. 사르트르의 ‘구토’ 주인공은 “삶이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진심으로 삶이란 아무것도 아니고, 그저 텅 빈 껍데기일 뿐이라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죽음은 온 곳으로 돌아가는 것, 즉 자연의 사이클을 의미한다.

  ‘생명은 지나가는 것’: “인간이란 모두 집행기일이 확정되지 아니한 사형수들이다.(빅토르 위고)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계속 불로장생을 꿈 꿔 왔다. 죽음을 의도적으로 부인하면서. 현대인들 또한 의학 발전에 힘입어 노화방지에 많은 관심을 기우리고 있다. 그러나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생물학적으로 영원히 사는 길은 없다. 죽음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이에 순응하는 것이 자연법칙이다.

  죽음은 자연현상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드릴 때 이 문제는 해결되며, 노년에 절대고독에 시달리지 않는다. 죽음을 순리적으로 받아드릴 때 평안한 마음으로 저 세상으로 갈 수 있다. 죽음을 생각하면 남아있는 시간이 소중하고, 주어진 인생을 즐겁게 살다가야 한다는 생각이 더 절실해진다. 죽음의 문제를 빨리 해결할수록 노년의 삶은 풍부해지고, 만년에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미스라이는 죽음에 관해 배워서 평화롭게 저 세상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재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4) 죽음이 ‘자연법칙’임을 인정하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라진.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지만,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갈린다. 죽음을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며 살면 인생을 보다 풍부하게 살 수 있고, 마지막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철학자 제니퍼 마이클 헥트는 ‘죽음을 기억하라’를 행복의 네 가지 요소 중 하나로 들고 있다. 생텍쥐페리는 “죽음이 세상의 순리라고 생각하면 쉽게 죽을 수 있다”고 했다. “세상에 나는 것도 운명, 죽는 것도 운명; 진실로 이 이치에 통달한다면 무엇을 슬퍼하랴. 사람은 덧없는 것이고, 죽음은 쉬는 것; 한탄할 게 뭐 있는가?(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살아가면서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을 슬퍼하겠는가? 인간은 왔다가 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진리로 인식하고 수용해야 죽음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죽음은 그 자체가 인생의 학교이고 스승이다.

  세네카는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인간은 신성을 만나게 된다.”고 했으며, 프랑클은 “죽음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 자체를 헛되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죽음은 생물학적으로는 인생의 끝이지만, 도덕적으로는 ‘삶의 완성’이라고 한다. 인생이란 죽을 때까지 성장하는 과정이고, 죽음으로써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인생이 한권의 책이라면 죽음은 책을 완성하는 작업이다. 니체는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며 “한숨 쉬며 탄식하는 것은 오페라 배우에게 맡겨라. 쾌활하게 살자.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지금이 바로 기회다.”라고 말했다. 노년에 행복도가 가장 높은 이유는 바로 이러한 깨달음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문제를 일찍 해결하는 것이 마지막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죽음에 대한 불안은 건강의 수준, 교육의 정도, 종교성의 강약 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만, 그 본질의 차이는 없다.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란 의미 있는 삶, 사랑하는 삶, 봉사하는 삶, 사회에 귀감이 되는 삶을 포괄하는 ‘깨어 있는 삶’을 산다는 의미이다.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죽음의 연습’을 해야 한다. 하루하루가 최후의 날인 것처럼 사는 것이 죽음의 훈련인 동시에 삶의 기술이다. 나름대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살아갈 때 남은 인생을 행복하고 보람되게 살 수 있다. 가능한 한 빨리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노년에 행복을 누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5) ‘종교’는 나름대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종교는 인간에게 현세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보다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큰 목표가 있다. 일반적으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 사람들보다 신앙인이 죽음의 문제를 잘 해결한다. 노년에는 영성이 강해져 종교에 귀의해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영성은 종교성만을 의미하지 않고, 과학적 차원을 넘어 인간, 자연과 사회의 가치와 관련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말한다. 철학자 스펜서는 “인간은 삶이 두려워 공동체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고 했다.  이러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가 있다.

 

  죽음의 문제는 종교에 따라 달리 해석한다. 기독교에서는 천국이 있고, 인간이 구원을 받으면 죽은 후 다시 부활해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영생’을 설교한다. 불교에서는 윤회설을 내세워 이승에서 저승으로 돌고 도는데, 이승에서의 업보에 따라 달리 ‘윤회’한다고 설법을 한다. 이처럼 종교들은 죽음 뒤에 돌아갈 세계를 만들어 희망을 줌으로써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종교의 역할은 죽음을 막아주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없애주는 데 있다. 종교는 장래 일어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종의 보험역할을 한다.

  종교는 교화의 수단으로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놓고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종교에 귀의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노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은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종교에 귀의하는 경향이 있다. 종교에 관심이 많을수록 영성은 깊어간다. 믿음과 영성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종교적 행복’을 누리는 방법이다. 여하튼, 종교를 믿으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고, 죽음에 대한 공포나 강박관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므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무신론자보다 더 행복한 것은 사실이다.  

 

(6) 죽음은 ‘어디에나’ 있다(?)

 

  헬만 헷세는 “죽음이란 저기 또는 여기에 있지 아니하고, 모든 길 위에 있다. 너의 그리고 나의 내면에 깃들어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죽음이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정신적 죽음’을 말한다. 이러한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이 닥쳐왔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로서 참된 삶의 길을 벗어날 때 오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가치는 정신적 생명인 꿈과 희망에 있다. 꿈과 희망을 잃으면 죽음과 같다. 노년이 되면서 사람들은 꿈을 잃거나 희망을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꿈과 희망을 잃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으로 인생의 끝자락까지 간직하고 살아야 행복으로 갈 수 있다.

  노년이 되면 사회참여를 기피하면서 스스로 고립상태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노년에는 성격이 점차 내향적으로 변하여 적극적인 교류를 기피하는 성향이 생긴다. 또한 인간에 대한 회의감이 들게 되면 대인기피증 같은 것이 생긴다. 심리학자 커밍과 헨리는 이처럼 사회에 참여하지 않고 고립상태로 살아가면서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판단하는 것을 ‘사회적 죽음’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성향은 사회적 행복을 포기하는 측면도 있지만, 반대로 창조적 활동을 하면서 고독을 승화시키면 더 행복을 누릴 수도 있으므로 이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부당하다.  

  마지막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노년에도 항상 열정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젊음을 유지할 수 있고, 여생을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불굴의 의지와 강인한 인내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노년에도 새로운 것을 찾아 성취하기 위해 배움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며, 항상 도전정신을 가지고 어떠한 난관도 넘어설 수 있는 적응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다. 내면에 스며드는 정신적 죽음을 극복하고 건강한 삶을 누림으로써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이 노년의 마지막 과제이다.  

 

(7)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저 세상으로 갈 준비를 하자.

 

 

  죽음은 불시에 느닷없이 찾아온다. 그러므로 노년에는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서 죽음을 준비할 뿐 아니라 이별하는 연습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랑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별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보들레르) 이별을 예고하고, 삶의 자취를 아름답게 남기는 것이 자아완성으로 가는 길이다. 일본에서는 살아있을 때 장례식을 치르는 ‘생전 장례식’이란 것이 있다. 장례식장에서 보면 조문객들이 망자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덕담을 하는 수준에서 대화가 오간다. 망자와는 아무런 교감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죽음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살아있을 때 작별인사를 나누고, 삶에 대한 소통을 하는 것이 삶을 아름답게 마감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어느 고대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가 ‘생전 장례식’을 했다는 뉴스가 조선일보에 특집으로 실렸다. 죽기 전에 지인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형식으로 했는데, 출판기념회를 겸해서 했다. 고대사 연구를 하면서 그 결과물을 자비출판을 해서 세상에 알리고 있다. 저자도 생전에 장례식을 해서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려고 준비를 해오고 있다. 기본적으로 그 뜻은 같다. 그런데 그 명칭이 장례식은 죽은 사람과 이별하는 절차인데, ‘생전 장례식’이란 명칭이 안 어울려서 ‘고별식’으로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출판기념회마다 생전 장례식을 올린다고 참석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는데, 그것도 사리에 맞지 않으므로 한 번에 그칠 생각이다.

  저자는 이 행사를 통해 우리 장례문화를 개선하는 데 일조하겠다는 의도에서 시도했는데, 그 순서를 앗기고 나니 어떻게 할까 주저했지만 그대로 추진할 생각이다. 다만 이제는 시기가 중요하지 않으므로 서두르지 않고 적절한 시점에 할 예정이다. 인도 여행을 하면서 사진을 찍고 그 이미지와 관련한 내용을 엮어서 ‘인생, 길’이라는 인생론에 관한 책을 마지막으로 출간해서 증정하고자 한다. 이것이 내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작업이라고 믿으며.      

  조병화 시인의 시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는 죽음의 세계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와 같은 내면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시인이 머무는 곳은 항상 ‘가숙’(假宿)이었다. 시인은 항상 고독 속에 갇혀 살아왔고, 영원한 안식처를 찾기 위한 준비를 해 왔을 것이다. 그러한 고독이 바로 이 시인의 시의 모태였으며, 현실과 이상을 연결해 주는 교량역할을 했으리라고 본다.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를 발표하신 후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살아가시는 시인의 모습은 고독 그 자체였다. 그러니 더욱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살아가야한다는 생각이 앞을 가린다.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하며 사는 인생은 귀하고 의미가 있다. 이러한 삶이 마지막으로 추구하는 행복의 모습이리라.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조병화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눈

아름다운 입술, 아름다운 목

아름다운 손목

서로 다 하지 못하고 시간이 되리니

인생이 그러하거니와

 

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는 일’일세

 

작별하는 절차를 배우며 사세

작별하는 방법을 배우며 사세

작별하는 말을 배우며 사세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정, 아름다운 말

 

두고 가는 것을 배우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인생은 인간들의 옛집

! 우리 서로 마지막 할

말을 배우며 사세

 

(8) ‘귀천’을 생각하며 죽음을 준비한다.

 

  천상병 시인이 이 세상의 소풍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간 지 어언 30여년이 흘렀지만, 그의 소망, 아니 그의 모습을 닮은 ‘귀천’이라는 시는 지금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그는 순진무구한 마음과 무욕의 정신으로 시를 써 왔다. 이 시는 우리들 가슴속에 남아서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거울이 되고 있다. 시인들이 그의 시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하든 간에 이 시는 그의 대표작으로 누구에게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저자도 남은 인생을 이처럼 순진무구하게 살다가 “이 세상이 아름다웠다”고 노래하며 저 세상으로 건너갈 수는 있을 지 의문이 든다.  

  세상을 살면서 인간은 많은 고통을 겪게 되고, 인생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불교에서는 인생이란 ‘고해’라고 부르지 않는가? 우리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람 때문이다.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않으면 사는 것이 힘들어지고 불행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인간은 이기적 동물로써 인간 간의 관계나 사이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주고 회의를 느끼며 결별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타심을 키워 세상을 아름답게 살다가 간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거의 힘들다. 이러한 시심에 젖어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이 노년의 마지막 행복이다.  

  천상병 시인에 관해서는 사석에서 그의 과거에 관하여 들은 적이 있다. 의정부시에서는 매년 5월이면 ‘천상병 축제’를 연다. 시화전이 가장 중요한 행사이지만, 그의 일생을 소재로 한 연극도 공연된다. 그 연극을 보면서 그의 실존을 머릿속에 형상화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어떻게 이처럼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었는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들은 모방할 수 없고 또한 이해하기도 쉽지 아니한 기행을 들어온 터라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감성을 간직하고 살면서 마지막을 장식하고 저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 이상적인 인간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귀 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9) 생명권은 권리인 동시에 의무로써 ‘자살’은 인정되지 않는다.

 

  생명은 인간의 존엄성의 기초이고, 가장 중요한 가치이므로 생명은 존중되어야 하며, 생명권은 권리인 동시에 의무이므로 자기 생명도 포기할 수 없다. 자신의 하나뿐인 삶: 스스로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주인공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독백을 하는데,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그것은 생사의 문제가 아니라 자살의 문제이다. 생명은 신의 선물이므로 다른 권리처럼 스스로 처분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이 인정되지 않는다. 카뮈는 “참으로 중대한 철학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라고 하면서 자살은 ‘도피’라고 했다. 누구나 자기 생명을 존중하면서 살아가야할 의무가 있다.

  한국인 자살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으며, 노인 자살률도 세계 1위이다.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피할 길이 없다. 개인적으로 자살을 하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가족의 붕괴, 절대적 빈곤, 심한 경쟁에서 오는 중압감, 사회적 갈등과 고립감, 중증의 질병, 은퇴 이후의 상실감과 외로움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근본원인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애심이 사라지고, 환경을 이겨낼 수 없는 무능감과 미래에 대한 절망감이 크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자 카뮈는 자살은 도피일 뿐이므로 인간은 세상의 부조리함을 극복하고 자기 결정에 책임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어떤 어려움이 부닥칠지라도 죽을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면 반드시 극복할 수 있고, 언젠가는 반드시 희망의 날이 올 것이다. ‘자살금지’를 거꾸로 읽으면 ‘지금 살자’ 아닌가?

  생명은 권리와 의무라는 법적 차원을 넘어 ‘존재의 가치’로써 외경하는 정신으로 존중하며 살아가야 한다. 노년의 경우 아무리 힘들더라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남은 삶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도리요 책무이다. 65세 이상 독거노인이 현재 133만 명을 넘어서고 있는데,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고독사(孤獨死)가 늘어나고 있다. 가족이나 보호자의 돌봄이 없이 홀로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가족제도가 해체되는 것이 기본적인 이유지만, 공동체가치가 무너지면서 이웃을 돌보는 사회적 관습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사회안전망을 구축하여 이런 현상을 막도록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 한다.  

 

(10) 고통 없이 ‘자연사’하는 것이 마지막 행복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 문제가 인간이 풀어야할 마지막 숙제이다. 노인들의 마지막 소망은 ‘존엄하게 죽는 것’(존엄사)이다. 행복추구권은 인생의 마지막 과정까지 적용되고 보장되어야 하다. ‘잠자는 듯한 죽음’(자연사)이 자연의 축복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생의 마지막 단계인 죽음에 있어서도 존중되어야 한다. 누구나 노년에는 죽음을 생각하며 고통 없는 이별을 꿈꾼다. 인생의 마지막 가는 길에서 고통을 느끼지 않으면서 간다면 아름다운 종말이 되지 않겠는가? 본인에게도 좋고, 가족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으므로.  

 

  ‘존엄사’란, 법적 개념으로는, 생명 연장을 위한 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연명치료거부권’을 말한다. 그 법적 근거는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헌법 제10)에 기초한 자기결정권에 두고 있다. 고통 받지 않고 비참하지 않게 죽는 좋은 죽음이 마지막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죽음을 맞이할 때도 인간답게 죽는 것이 중요하며, 살던 집에서 고통 없이 생을 마감하는 것이 행복의 끝자락에 속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병원에서 마지막 삶을 보내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다. 그러므로 본인은 물론 가족들도 신경을 써서 미리 존엄사를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는 존엄사법이 제정되었으므로 평안하게 저 세상으로 가는 길이 열려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존엄사를 선택해서 마지막 행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1)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음의 질’이 낮다.

 

  그동안 웰빙이 사회적 화두이었지만, 고령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제는 ‘웰다잉’(좋은 죽음)이 최대의 관심사가 되었다.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인간의 마지막 행복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산하 연구소가 행‘죽음의 질’ 조사에서 한국은 OECD를 포함한 40개국 중 32위로써 하위권에 속한다. 누구나 노년에는 죽음을 생각하며 고통 없는 이별을 꿈꾼다. 그런데 죽음을 연장시키기 위해 우리니라 사람들은 온갖 노력을 한다. 한국 사람들은 생명에 대한 집착이 강한 편이고, 부모들은 어떻게든 오래 살도록 하는 것이 효도라는 전통이 있다.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을 대부분 병원에서 맞이하는데, 그 비율이 70%에 이른다. 평생 의료비의 절반을 죽기 전 한 달, 25%를 죽기 전 3일에 사용한다고 한다. 이처럼 ‘연명치료’를 받게 함으로써 본인은 물론 가족과 병원에 힘든 부담을 주는 등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

  이제 죽음에 대한 인식을 전환할 때가 왔다. 죽음은 자연의 섭리요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이 순리이다. 실제로 회생할 가능성이 없고 고통만 따르는 경우에는 생명의 연장이 오히려 비인도적일 수 있다. 무의미한 생명의 연명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자연사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죽음의 장소는 자택에서 자연사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환자의 통증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경우에는 불가피하게 병원에서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생명을 적극적으로 단축시키는 ‘안락사’는 인정되지 않으며, 이는 형법상 범죄에 속한다. 외국에서는 안락사가 일부 국가에서는 행해지고 있으며, 다수의 국가가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는데, 그 부작용을 어떻게 막느냐가 법적으로 중요한 과제이다.

 

(12)‘대법원’이 최초로 존엄사를 인정하였다.

 

  오늘날 존엄사 문제는 세계적인 화두가 되고 있으며, 많은 선진국에서는 입법화되기 시작하였다. 존엄사 문제는 생명권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법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 동안 존엄사 문제가 이론적으로는 제기되어 왔지만, 법적으로는 인정되지 않고 있었다. 종교계에서는, 특히 기독교는, 교리 상 자연사를 반대해 왔으며, 의료계에서도 갑론을박이 행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에 보라매병원에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의료진이 살인방조죄로 실형을 선고 받자 병원들은 소생가능성이 없는 환자라도 퇴원을 시켜주지 않는 역기능이 나타났다. 그러자 2009년에 김 할머니가 세브란스병원에서 뇌손상으로 식물인간이 되자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달라’는 소송을 가족들이 냈다.

 

  대법원은 ‘김 할머니 사건’에서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른 때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연명치료의 중단이 허용될 수 있다.”고 판시함으로써 최초로 존엄사를 법적으로 인정하였다. 그 결과 사회적으로 존엄사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되고, 적극적으로 이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국민들이 이 문제를 충분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존엄사 문제가 법적으로 인정을 받게 됨으로써 누구나 마지막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국민의식이 전환되어야 하고, 국가적으로는 적극적인 정책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누구보다 노년들은 자신의 문제이므로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자연사하도록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3) ‘웰다잉법’이 존엄사 문제를 해결하다.

 

  선진국에서는 웰다잉법이 점차 입법화되는 추세에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9년에 김 할머니 사건이 있은 후 10년 만에 국회에서 ‘웰다잉법’이 통과되었다. 그 공식명칭은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이다. 불필요하게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하는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는 연명의료 중단의 요건은 회생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않으며,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이 임박한 경우에 본인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의사가 작성한 ‘연명의료계획서’를 통해 본인의 의사를 분명하게 밝혀두었거나, 2명 이상의 가족이 확인해주면 된다. 환자의 뜻을 알 수 없는 때에는 가족 전원의 합의가 있어야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다.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종류는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제거 등 네 가지 치료에 국한되며, 통증완화 치료나 영양분과 물, 산소 공급은 중단할 수 없다. 존엄사제도의 역기능을 막기 위해서는 그 요건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 잠자듯이 평화롭게 이 세상을 떠나는 자연사가 최선의 방법이다. 과잉진료를 막고 인간답게 저 세상으로 떠나도록 만드는 것이 존엄사제도이다. 괴테처럼 “빛을 좀 더”라고 외치면서 이 세상을 떠나면 다음 생에 환한 세상을 맞을 것 같다. 노년에는 사후에 법적 분쟁이 생길 위험성을 없애기 위해 사전에 유언장을 작성해 두는 것이 마지막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가족들도 신경을 써서 본인이 준비를 못한 경우에 대비하여 유언장을 준비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14) ‘상속제도’를 합리화시켜야 한다.

 

 과연 인간이 저 세상으로 가면서 남기고 갈 유산은 어떤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어서 자식들에게 남겨주고 가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최소한의 것은 좋지만, 그 이상의 자산을 물려주는 것은 본인을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 세계적인 갑부들은 많은 재산을 기부하고 이 세상을 떠나지 아니하는가? 값지고 의미 있는 유산은 재산이 아니라 ‘이름’이다. 그것이 발명품이나 작품이든, 기부나 봉사든 간에 그 형태는 다르지만, 이들이 남기는 것은 자신의 이름이요, 얻는 것은 명예 또는 평판이다. 재산은 그것으로 끝나지만, 이름은 영원히 남는다. 그러므로 남은 자산은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하지 말고, 기부 등의 형태로 사회에 돌려줌으로써 이름을 남기고 가는 것이 마지막 행복 아닐까?  

 

  저자는 은퇴하면서 전공분야에 관한 집필을 접고 인문학 분야에 관한 집필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행하면서 여행기와 여행수필을 썼다. 터키여행을 하면서 비로소 여행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구원의 길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최상의 행복을 느끼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러한 행복은 개인적 행복이고 이기적인 행복임을 깨닫고, 사회에 봉사하는 길이 어디에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육체적으로나 전공을 가지고는 봉사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행복을 주제로 유튜브를 운영해볼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행복에 관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는데, 많은 책을 읽어도 체계적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해답을 줄 수 있는 책이 없었다. 그 결과 문외한으로서 감히 행복에 관한 책을 직접 써보기로 했다. 자비출판을 해 기증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소망하며 계속 집필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름을 남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봉사의 일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공동체적 행복을 누리면서 내 인생의 마지막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고 있다.  

 

(15) 전통적인 ‘장례문화’를 개선하자.

 

노년은 저 세상으로 마지막 가는 방법을 미리 생각하고 준비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유교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 장례문화는 허례허식에 젖어 장례절차가 복잡하고 많은 시간을 제사에 소비했다. 부모님을 잘 모시는 것이 조상에 대한 예우이고, 자녀들의 효심의 발로라고 생각해 왔다. 허례허식 때문에 장례비용이 너무 과도한 것도 문제다. 어디에 묻힐 것인가가 노년의 중요한 문제였다. 종전까지 우리 장례문화는 시신을 무덤에 매장하는 형태가 주종을 이루어 왔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좋은 장지를 찾아다니고, 그래서 아름다운 산을 곳곳에서 파손하여 자연을 파괴하고 자연경관을 훼손했다.

  이제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전통이 무너져가고 있다. 장례절차도 간소해지고, 제사로 모시는 행사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아직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장을 방문하거나 장례식에 참여하는 폐단이 남아 있다. 장례에도 교환방식으로 오가고 주고받는 관행이 있어 왔다. 불교식으로 화장을 해서 봉분을 하지 않고 집안 어른들을 함께 모시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자연친화적인 수목장도 늘어나고 있다. 이제 합리적인 방향으로 장례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우리나라도 죽음의 질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을 ‘종활’(終活)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 고령화 사회가 됨에 따라 존엄하게 죽기 위한 방법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 방법으로는 불필요한 물건을 처분하는 ‘데스 클리닝’ 작업이 있고, 음식을 먹으며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데스 카페’도 있다. 장례식이 죽은 후 산자들의 잔치가 아니라 죽기 전에 마지막 이별을 고하는 ‘사전 장례식’이 더 의미 있는 행사가 아닐까?

  저자는 살아서 하는 장례식을 ‘고별식’으로 명명하고, 마지막 저서를 출간해서 증정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마지막 자리를 만들고 싶다. 적당한 시기에 일자를 잡아 평소에 교류하던 사람들을 초대하여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나누고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 더 아름답고 의미 있는 이별이 아닐까? 이별은 오직 한번, 그것으로 족하다. 사망을 하면 장례일자와 장소는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고 가족끼리 치르기를 당부한다. 살아서 죽음을 준비하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서로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허례허식인 우리나라의 장례문화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바꾸는 것이 시급하다.

 

 

(16) ‘유언장’을 준비하다.

 

  유언장을 준비하는 것은 저 세상으로 가는 길을 준비하기 위한 필수적 작업이다. 그래서 유서 쓰는 연습을 하는 것도 인생을 회고하면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정리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지, 무엇을 하다 갈 것인지 정리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죽음을 미리 생각하거나 작성하는데 신경이 쓰여서 기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유언장은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기 위해서 필요할 뿐 아니라 재산문제를 둘러싼 법적 문제를 정리해두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저자는 마지막 여행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그 뜻을 남겨두고 싶어 유언장을 미리 준비했다. 우리 집안은 가족납골당을 마련하고 선조들을 이곳에 모시고 있다. 그런데 본인은 이곳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그 속에 갇혀 있는 영혼은 얼마나 답답할까? 대자연을 버려두고 좁은 공간으로 들어가 갇혀 있으면 말이다. 묘에 묻힐 것이 아니니 묘비명은 필요하지 않고, 남길 것도 없고 줄 사람도 없으니 상속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 본인이 가서 영생을 누리고 싶은 곳을 유언으로 밝혀두면 된다.

 

내 육신 자연으로 돌아가고

내 영혼 바람 따라 흐를 수 있도록

 

화장을 한 나의 잔재를

 

평소 내가 오르내리던

깊은 산속 조용한 곳

이곳저곳에 뿌려주기를!

 

내 영혼이 진정 자유함을 누리며

저 세상을 비행할 수 있도록

 

마지막 가는 길, 그 순간 그곳에서

평소 좋아하던 베토벤 교향곡 No. 5를 들으며

저 세상으로 건너가고 싶다.

힘 찬 걸음으로 늠름하게 활보하면서

 

“최선을 다해 살았노라.

 

한 마디만 남기고...

 

  이처럼 유언장을 준비하면서 기쁨을 느낀다. 컴퓨터를 치는 동안 웃음이 입가를 스쳐간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으로 간다는 기대 때문인가? 저 세상에서는 진정 자유함을 느낄 것이라는 희망 때문인가? 저 세상으로 가는 시간은 본인이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지만, 가고 싶은 곳은 본인의 뜻대로 정할 수 있으니 완전한 자유의지의 발로이다. 그래, 남은 시간 즐겁게 놀다 가자. 과거도 잊고, 미래는 생각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지금 이 순간에 영원이 숨 쉬고 있고, 지금 이곳에 구원의 길이 열려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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